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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은 아무 생각 말고... 마음 편하게 놀자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아침부터 덥다. 그제는 28도, 어제는 30도였는데 바람 한 점 찾을 수 없는 뜨거운 날이었다. 지열은 밤에도 식지 않았는지 아침부터 더워 밖을 내다보니 햇볕이 쨍쨍하다. 어제는 너무 더워 아침에 산책을 다녀온 뒤부터 지하실에서 더위를 식혔는데 오늘도 별 수 없을 것 같다. 이곳은 햇볕이 강해서 이런 날 밖에 돌아다니다 가는 살을 태우는 정도를 넘어 익는다. 오랫동안 겨울이 길고 추운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피부가 변해서 추위에 강해지고 더위에 약해졌는지 더위에 아주 예민하다. 한 여름에 한번 한국에 다니러 갔다 너무 더워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여름에는 절대 한국에 가지 않는다. 어쩌다 가게 되면 보통 4월에 가는데 지난 3년 전에 멋도 모르고 6월에 갔을 때도 더위 때문에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이곳은 건조하고 봄이 늦게 오거니와 뜨거운 여름이라도 바람이 시원하고 비가 오면 오히려 춥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여름휴가차 살다가기도 한다. 끈적 거리지도 않고 덥지 않아 한국의 봄 날씨 같다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여름을 지내고 겨울에는 미국이나 멕시코 같이 따뜻한 곳에서 긴 겨울을 지내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 갑자기 이렇게 날씨가 뜨거워지면 사람들은 복권이라도 맞은 것처럼 좋아하며 밖으로 나가서 선텐을 하다 보면 지나쳐서 화상을 입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병원 응급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여자가 새빨갛게 익어가지고 들어왔는데 상당한 화상을 입은 듯해 보였다. 아파서 쩔쩔매며 치료를 받고 울상이 되어 나왔는데 움직일 때마다 스쳐 쓰라림에 어떨 줄 몰라하던 생각이 난다.


여름이 짧다 보니 햇볕만 보면 사람들이 난리가 난다. 짧은 옷을 입고 공원에 요를 깔고 누워서 선탠 하느라 살이 익어가는 줄도 모른다. 나중에 집에 가서 아프더라도 선탠을 해야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 말릴 수도 없다. 워낙에 잘 타지 않는 피부를 가진 나는 태우고 싶어도 안 탄다. 며칠 동안 햇볕에 앉아 있으면 조금 타는 듯해도 금방 벗겨져 생전 휴가 한번 다녀오지 못한 사람처럼 하얗다. 어떤 때는 조금만 밖에 있어도 새까맣게 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한데 타고난 피부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결혼 후 남편 고향에서 신혼살림을 했는데 시골사람들은 대체로 피부가 검게 타 있는데 비해 피부가 유난히 하얀 서울에서 온 새댁의 얼굴에 놀라는 사람도 많았다. 햇볕에 잠시만 나가도 타는 사람은 뜨거운 한 여름에도 얼굴을 가리고 사느라고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나마 다행이다.


어릴 적에 여름 방학 때 시골 작은집에 놀러 가면 동네 아이들이 얼굴이 하얀 서울 사람을 구경한다고 내 주위에 몰려들었던 생각이 간혹 난다. 그래도 백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얼굴이 하얘서 좋은 점도 많다. 화장을 안 하고 립스틱만 발라도 화장한 것 같으니 경제적으로 좋고 여름엔 끈적이지 않아 좋다. 밤에 화장 지울 일도 없고 외출할 때 화장하느라고 시간 끌 일도 없는데 세월이 흐르니 여기저기 없던 주름과 티가 생겨 가려야 한다. 부분 화장만 해도 화장한 것 같던 얼굴이 요즘엔 더 해달라고 한다. 보기 흉한 것보다 가리고 감춰서 라도 숨기고 싶은 본능이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다 보니 보기 싫은 곳 여기저기 가릴 수 있어 좋다. 마스크 쓰는 게 처음에는 귀찮았는데 화장을 하지 않아도 좋고 주름이 있어도 보이지 않아 좋다. 세상일 이라는 것이 한쪽만 좋고 나쁜 게 없는 것 같다.


시작할 때는 새삼스러워도 다 적응하며 사는 게 사람이다. 모자로 흰머리를 가리고 안경에 마스크까지 쓰고 다니면 다들 똑같아 보인다. 마스크를 얼마나 더 쓰고 다녀야 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다 벗고 다니게 되면 너무 늙어서 사람들이 몰라볼지도 모르니 열심히 얼굴 마사지라도 해야겠다. 운동도 좋고 건강도 좋지만 어제나 오늘같이 더운 날에는 마스크도 멋진 옷도 다 거추장스럽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뒤뜰에 앉아서 오고 가는 새들과 놀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텃밭 채소들과 노는 게 제일이 다. 집에서 뒹굴 거리는 재미를 알면 산책이고 운동이고 다 귀찮아지겠지만 더위 먹고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낫다. 때로는 게으름도 보약이고 노는 것도 장수의 비결이다. 옛날 노래에 '노새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노래가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노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논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며 돈도 벌고 시간 있을 때 신나게 놀며 살아야 하는데 몇백 년 살 것처럼 돈만 벌려고 애쓰며 살다 보니 세월이 갔다. 아직 놀 수는 있으니 더 늙기 전에 시간 날 때마다 열심히 놀자. 있는 게 시간이라고 장담했는데 따지고 보니 얼마 안 남았다. 지금은 백수가 아니고 베짱이가 되어 산다. 놀면서 노래나 부르며 살다 보면 겨울이 오는 것도 모르고 놀기만 한다. 집안 청소도, 정리도, 할 일이 많아도 모른 체하며 산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산책 갔다 와서 점심을 먹고 앉아 있으면 잠이 쏟아진다. 산책도 일이라고 몸이 피곤한지 한숨 자고 일어나서 조금 있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드라마나 오락을 보고 있으면 잠이 온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밤을 맞는 요즘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될까 그런 생각이 든다.


정년퇴직한 뒤에 처음에는 노는 게 익숙하지 않아 놀다가도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 집안을 돌아다니며 할 일을 찾아 했는데 이제는 노는 것도 이력이 생겼다. 어차피 어느 날 대청소를 해야 하니 놀 때 놀며 베짱이나 되어보자. 옆집을 판다고 내놓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팔렸는데 아예 큰 트럭을 집 앞에 갖다 놓고 쓰레기를 가득 채우고 서있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게 얼마 안 되는데 이것저것 쌓아놓고 살다 보니 이사 가는 날은 모아놓았던 물건을 쓰레기로 버린다. 쓰는 물건만 가지고 쓰게 되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저 많은 살림이 쓰레기장으로 갈 것을 생각하니 겁이 난다. 모을 필요도 없고 쌓아 놓을 필요도 없다. 그저 필요한 것 몇 가지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모르겠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더운 날은 시원한 곳에서 놀자.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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