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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면... 모든 게 고맙다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어느새 여름이 왔다. 초록이 온 세상을 덮고 청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더운 날에 덥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날씨가 추워졌다. 30도에서 15도로 내려가니 두꺼운 옷이 생각난다. 그래도 걷다 보면 더울 것을 생각해서 바람막이 재킷을 입고 걷는다. 밤에 비가 오는지도 모르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기분은 상쾌하다. 숲 속의 오솔길은 풀들이 자라 길이 점점 좁아진다.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에 고여있던 빗물이 떨어져 옷을 적시는 게 싫지 않다. 봄이 떠난 자리에 여름이 찾아와서 함께 걷는다. 어디서 이 많은 풀들이 생겨나 자라는 걸까? 먹지도 못하는 풀들은 왜 나왔다 죽을까? 아이 같은 질문을 하며 오솔길을 걷는다. 산책을 나오면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가 나는 아이가 되어 고향 산천을 오른다. 알 수 없는 풀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름이 궁금해진다.


길쭉하고 동그랗고 넓은 아파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숲에서 과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할까? 먹을 수 있는 풀이 있고 목숨을 앗아가는 독을 품은 풀도 있다. 필요하고 좋은 것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고 선과 악이 존재하고 불필요하고 보잘것없는 것들도 존재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다. 산에 나무만 있다면 얼마나 삭막할지 상상해 본다. 풀과 나무와 꽃과 시냇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그곳에서 모든 생물들이 먹고 놀고 일하며 산다. 걸어가는 발길을 따라 모기도 동행하며 친구 하자 고 한다. 귀에 가까이 와서 귓속말로 윙윙대며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거절하며 손사래를 치고 쫓아버린다. 숲 속은 이미 많은 벌레들이 살림을 차린 지 오래돼서 가는 곳마다 무언가가 따라다닌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날것들이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고 꼬물댄다.


길에는 개미가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거미줄이 쳐져있고 벌들은 앞뒤로 다니며 겁을 준다. "내가 꽃인 줄 아나 보지? 내가 꽃같이 예쁜가 봐". 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걸어간다. 여름은 좋은데 벌레가 많아서 싫다. 유난히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는 벌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데 벌레가 없으면 사람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비가 와서 인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유속도 빠르고 물도 많아졌다. 눈이 녹을 무렵에 넘치던 물이 제자리를 찾고 빼앗겼던 오솔길이 다시 나와서 그 길을 걸어본다. 물이 땅을 점점 깎아 먹다 보면 머지않아 이 길도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물도 좋고 날씨도 좋은데 겁쟁이 수달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속에서 헤엄치고 장난을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바탕 쇼를 보여주는데 아직은 아닌지 소식이 없다.


(사진:이종숙)

한참을 걷다 보니 누군가 인디언 티피를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인다. 지난여름에 아이들이 여기저기 만들어 놓았던 나무집들은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다 쓰러지고 새로 지은 나무집이 꽤 튼튼해 보인다. 가까운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집 앞에다 의자까지 갖다 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쉬고 가게 한다. 계곡을 따라가는데 오리도 같이 가자고 한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새들이 노래하고 다람쥐들은 나무를 오르내리는 곳을 걷고 있으니 이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하늘을 찌를듯한 나무들은 꼭대기에 나뭇잎을 달고 세상을 내려다본다. 시에서 관리를 하는 이 공원에는 다리가 여러 개가 있는데 오래되어 다리를 걷다 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넓은 산책길을 막아놓아 오솔길로 걸으니 더할 나위 없이 아기자기하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도 들꽃들은 여기저기 피었다 진다. 여름이 가기 전에 그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안다. 며칠 피었다가 져야 하는 것을 알기에 하루가 아쉽다. 보라색 방울꽃도 피고 덩굴나무도 빨간색 꽃을 피운다. 종같이 생긴 하얀색 꽃도 피고 야생 장미도 진분홍 색으로 곱게 핀다. 겨울이 끝나고 오는 봄은 차라리 황량한 편이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꽃샘바람을 이겨내며 살아남는 봄은 풍성한 여름을 주고 떠난다. 봄의 희생이 없다면 이 아름다운 여름은 만날 수 없다. 이토록 아름답고 싱그러운 여름에 나는 겨울의 고독과 황량함을 잊으며 여름 속에서 산다. 쓸쓸한 낙엽들이 쌓이더니 하얀 눈이 내려 숲의 모든 것을 덮어버렸는데 지금은 딴 세상이 되었다. 겨울도 봄도 없고 여름만이 존재한다. 가을도 없고 쓸쓸함도 없는 그저 새파란 청춘만이 있다.


삶이란 계절 같아서 지난날은 잊어버리고 오늘을 맞으며 감사함 또한 망각하고 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이룬 듯이 자랑하며 사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따스한 기원으로 세상을 맞고 보냄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과 기아로 헐벗고 굶주림으로 새로 오는 날들이 두려운 사람들이 많다. 눈물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평화를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평을 하는 나를 하늘이 내려다본다.


춥던 덥던 계절에 순응하며 사는 자연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며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좁고 넓은 길을 오르고 내리며 삶을 본다. 살아온 날들은 잊히고 앞으로 살아갈 날은 모른다.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 모든 게 고맙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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