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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린 곳에서... 피어나는 들꽃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하늘이 물감을 부어 놓은 듯 파랗다. 연일 더운 날씨가 계속되지만 아침나절엔 그나마 견딜만하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나뭇가지에 오고 가는 새들을 보니 참으로 평화롭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텐트를 쳐놓고 의자와 간이침대를 놓아두고 하루를 시작한다. 해먹과 그네는 누군가 와서 앉아주기를 바란다. 두 아들 식구들이 집에 오면 열 식구가 북적거린다. 아들 며느리 그리고 네 명의 손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먹고 논다. 매일 만나도 오랜만에 만난 듯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앉았다 하면 얘깃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손주들이 놀고 던져 놓은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뒹굴어 다니는 뜰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 지붕 위에서 돌아가는 팬도 너무 더운지 천천히 움직이고 아침 내내 떠들어대던 새들도 조용해졌다. 더운 날을 맞기 위해 휴식을 취하나 보다.


봄인지 겨울인지 모르게 5월에도 눈까지 오며 변덕을 부리던 날씨가 갑자기 여름이 되어 뜨겁다. 멕시코를 연상할 정도로 더운 날씨에 시원한 바닷가 모래사장을 걷고 싶은 생각을 한다. 며칠 사이로 텃밭에 심어 놓은 채소들이 부쩍 자랐다. 깻잎도 손바닥만 하게 자랐고 상추와 쑥갓도 훌쩍 자라고 고추와 호박도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고추가 자라지 않아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고추가 하나 둘 열리는 것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세상일이란 다 때가 있는데 미리 걱정을 사서 하는 인간이라 틈만 나면 걱정을 하며 산다. 죽어가던 체리 나무 옆으로 가지가 나오더니 제법 자랐다. 그만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죽은 나뭇가지를 잘라 주었더니 옆으로 난 가지들이 건강한 잎을 달고 잘 자란다. 죽어가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을 보며 죽은 가지를 잘라주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죽은 줄 알고 뿌리째 뽑아 버렸으면 어쩔 뻔했나 하며 인간의 연명치료에 대해 생각이 옮겨간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치료를 중단했는데 어찌어찌해서 고비를 넘기는 경우가 있다. 의사들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환자는 선택권의 여지가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린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가 말한 시간 즈음에 죽어 가지만 생각지 못한 의외의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체리 나무도 그와 비슷하다. 앞으로 큰 나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양쪽으로 가지를 뻗으며 당당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 앞으로 몇 년은 갈 것 같다. 옆에 자리 잡은 파와 부추는 씨를 매달고 꽃을 피우고 서 있다. 서서히 성장을 멈추며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다가 꽃이 피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갓과 열무도 노란 꽃을 피우고 있고 벌들은 열심히 꿀을 빨아대며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유난히 올해는 벌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오나가나 벌들이 윙윙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래도 자연은 아직 깨끗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바람이 없어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덥다. 어쩌다 불어오는 바람이 뱃속까지 시원해서 다시 한번 바람의 소중함을 느낀다. 제일 먼저 봄을 맞이하는 원추리가 파란 이파리만 무성하게 키웠는데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주황색으로 별처럼 생긴 원추리꽃은 키가 커서 바람이 불면 휘청거리고 저녁에는 꽃잎을 닫고 쉬다가 아침에 해가 뜨면 다시 노란 속을 보이며 피어난다. 원추리 옆에는 장미가 만발해야 하는데 올해 역시 작년처럼 벌레가 잎을 다 따먹어서 꽃을 피지 못한 채 꽃 몇 송이만 매달고 힘겹게 서있다. 말 못 하는 식물이 벌레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데 약을 주자니 그 옆에 있는 부추나 파를 해칠까 봐 그냥 두고 본다.


작년에는 여름 내내 벌레에 먹혀서 꽃도 못 피고 죽어 가더니 가을에 다시 살아나 이파리가 새로 생기며 늦은 가을까지 예쁜 빨간 장미꽃을 피웠는데 올해도 고비를 잘 넘기면 좋겠다. 약을 뿌리면 벌레는 없어지겠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생태계가 파괴될 것 같아 참고 기다리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연히 치료가 되는 것을 보면 성급할 것이 없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은 어디선가 놀러 온 구름 친구들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며 논다. 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고 동물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나무 모습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먼 거리를 가다 보면 피곤해서 짜증을 부리는 적이 있다. 그럴 때는 하늘에 있는 구름을 보며 기린이 있다 코끼리가 있다 하며 달래면 덩달아 곰도 있고 토끼도 있다며 맞장구를 치며 기분 전환이 되어 잘 놀게 되던 때가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구름 속에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하며 손주들을 얼르는 것을 본다. 간이 침대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이렇게 더운 날은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웬만하면 활동을 천천히 하는 게 좋다. 새들도 너무 더워서 아침 내내 떠들어대더니 어디선가 앉아서 낮잠을 즐기는지 조용하다. 간혹 가다 참새 한 두 마리가 와서 텃밭에 있는 무언가를 쪼아 먹고 가지만 세상은 더위에 지쳐 가만히 있다. 더워 더워하며 하루 이틀 지나가다 보면 여름 또한 그리워질 때가 온다.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삶이 계절 안에 있다. 어디서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사는 데이지꽃은 몇 년째 우리 집 화단을 지킨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세상에 나온 것이 좋아서 해마다 최선을 다해 피는 들꽃이 우리 집에 오니 예쁜 꽃 대접을 받는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뿌리내리는 곳이 고향이다. 어느새 긴 세월 이곳에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을 닮았다. 곧고 바르고 굳건하게 살며 깊게 뿌리내려 자손 대대로 번영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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