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갈 준비를 하지 않는데 가을이 아침저녁으로 틈틈이 방문을 한다. 일찍 나온 잎들이 조금씩 색이 변하고 파랗던 열매들은 노랗게 익어간다. 오지 말라는 가을은 오고 싶어 하고 여름은 아직 아니라며 가끔씩 뜨거운 태양을 쏟아낸다. 계절은 고집이 세다. 가야 할 때는 누가 말려도 가고 와야 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온다. 찬바람이 시작된 요즘엔 더워도 더운 게 아니다. 나무 끄트머리가 누렇게 되고 힘이 없다. 뒤뜰에 서있는 마가목 열매는 주황색이 되었다. 빨갛게 될수록 추워지고 겨울이 가까워진다. 무섭게 더웠던 지난여름이 가기도 전에 그리워진다. 아무리 뜨거웠던 여름도 지나고 나니 별것 아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럴 것이다. 괴롭고 힘들어도 다 지나가고 추억이 된다.
새봄을 맞고 좋아라 새잎을 달던 장미나무가 이제야 다시 봄을 맞았다. 여름에 벌레들이 다 파먹고 가지만 앙상하던 장미가 새봄을 맞은 듯 새파란 이파리를 달고 새로 피어난다. 먹을 게 없어서 벌레들이 떠난 틈에 새롭게 피어나며 잃었던 삶을 다시 사는데 코로나로 잃었던 우리의 일상을 찾을 수 있을지 아직도 막연하다. 상추도 쑥갓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내년을 기약하며 배추도 씨를 주렁주렁 매달고 옆으로 쓰러져 있다.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은 식물과 인간이 똑같다. 반질 반질 윤이 나던 예쁜 이파리는 거칠고 뻣뻣하게 되고 맛도 없다. 이제 남은 채소들은 다듬어서 살짝 삶아 된장국이나 끓여 먹어야 한다. 계절을 알고 갈 때를 준비하는 야채들을 보며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햇빛도 여름 같지 않고 한풀 꺾여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눈 뜨자마자 이른 아침부터 물장난을 하던 손주들도 이젠 밖에 나가려 들지 않는다. 너무 더워서 빨리 가기를 원했던 여름은 가을과 자리 바꿈을 하며 추억이 되어간다. 사과가 익어 하나둘 땅에 떨어지고 호박은 여기저기서 굵어져 간다. 꺽다리 해바라기는 시들어가는 야채들과 어설픈 이별을 하며 여름을 보낸다. 오지 않을 것 같은 계절이 왔다 가고 가지 않을 것 같은 계절이 온다. 태어나고 성장하여 소멸하는 세상 만물이 서로 닮았다.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지났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아침저녁에는 완연한 가을이다. 어느새 나무들은 군데군데 노랗고 빨간 이파리를 닳고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한다. 아픈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일 년에 네 번의 계절을 맞으며 보낸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철마다 새롭다. 다 알 것 같은 인생인 것 같은데 매일이 다르고 해마다 다르기에 인생은 알 수 없다고 하나보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손주들과 물놀이터에 갔는데 어찌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물놀이를 하며 노는 손주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물장난이 좋고 모래가 좋고 이것저것 오르내리는 놀이기구가 재밌다. 공을 가지고 놀고 물장구를 치며 신발이 젖고 옷이 젖어도 모른다. 추우면 어떻고 축축하면 어떠냐는 식이다. 한참을 신나게 놀더니 손이 시리다고 집에 가잔다. 집에 있으면 텔레비전이나 보며 뒹굴거릴 텐데 데리고 나오니 정말 잘 논다.
손주들이 놀이터에서 혹시라도 다칠까 봐 긴장하고 있는 남편과 나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달려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논다. 놀러 온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노는데 바람 때문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집에 왔는데 여전히 바람이 분다. 집안에서도 바람소리가 심하게 들린다. 하루라는 시간이 소리 없이 오고 가듯 계절도 말없이 바뀐다. 봄을 기다렸는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희미한 기억만 남았다. 마음의 시계는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와서 다시 미래로 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의 시계는 오고 간다. 어릴 적으로 돌아가서 놀고 다시 오늘로 돌아와 현재를 산다. 오지 않는 미래를 향해 가다가 다시 돌아와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