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기운이 없다. 가을이 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꼬리를 내리고 풀이 죽었다. 가을이 오기 전 늦여름은 왠지 쓸쓸하다. 나뭇잎도 힘이 없고 풀도 누워 있다. 새들도 신명이 안 나는지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고 한 가지에 앉아 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새로이 찾아오는 계절을 응시하며 가는 여름을 아쉬워한다. 그토록 뜨겁던 열기는 어디로 갔는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높아진다. 풍성한 텃밭은 초라하게 변해가고 씨를 익히며 마지막 여름 햇살을 받고 서 있다. 노랗게 피어 대던 호박꽃도 힘없이 달려있고 올봄에 시집 온 해바라기도 시들어 간다. 여름이 너무 더워 가라고 했는데 막상 여름이 가려고 하니 서운하다. 그렇다고 잡을 수 없고 보내야 한다. 하늘에 떠 다니는 뭉게구름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자연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겨울이 끝나가고 황량한 땅에 봄이 올 때는 희망에 부풀었는데 아름다운 가을이 오는데 마음은 이상하다. 희망보다 걱정이 앞선다. 긴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여름이 가기도 전에, 가을이 오기도 전에, 오지 않은 겨울 걱정부터 한다. 자연도 내 마음을 아는 듯이 계절의 처분만 기다리고 침묵한다. 어느새 뒤뜰에 있는 마가목 나무 열매는 빨갛게 익어간다. 봄이 오기도 전부터 봄이 온다고 좋아했는데 봄이 갔고 여름도 간다. 새파란 이파리가 나온다고 기뻐했는데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익어간다. 결혼 준비로 바빴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결혼한 지 43년이 지나고 아이들도 같이 늙어가는 세월이 흘렀다. 하루가 어찌 가는지 모르게 가고 있다. 지나고 나면 짧은 세월인데 하루하루 살기 위해 바쁘게 살다 보니 인생의 가을을 만났다.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해본다.
해먹에 누워서 조금씩 변해가는 나뭇잎을 보며 하늘을 본다. 4년 전 이맘때 22년 동안 하던 식당을 팔고 인수인계에 한창 바쁘던 때가 생각난다. 우연히 사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나 오랫동안 운영하던 식당을 그만두게 되었다. 단골손님들은 깜짝 놀라 믿지 못하겠다며 서운해했다. 아이들이 중학교 다닐 때부터 했던 식당을 그만 두려니 서운하긴 했지만 임자가 나타났으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팔았다. 나이도 되고 영원히 할 수도 없는데 좋다는 사람 있을 때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엄마 음식 먹듯이 자주 들리던 손님들이 그만둔다고 하니까 구름처럼 몰려들어 식사를 하러 왔다. 우리가 떠나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한번 더 먹겠다고 부모 형제 친구들과 몰려와서 식당을 메우던 날들이 생각난다.
(사진:이종숙)
어디나 있는 평범한 서양식당인데 그들에게는 특별한 식당이었다. 배고플 때 찾아오면 맛있게 많이 주고 외로울 때 찾아오면 엄마 맛 같은 식사로 위로받고 갔다. 아플 때 제일 생각나는 식당이라며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가기 전에 들려서 먹고 가는 식당이었다. 아무 경험 없이 시작한 식당이었지만 최고의 대접으로 손님들을 대접하며 지난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2주 동안 마지막 정리를 하고 손님들과 작별하고 헤어지던 날이 기억난다. 우리가 없어도 자주 오라고 부탁하며 또 하나의 역사를 접고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응원을 해주던 사람들을 길에서도 만나고 수영장이나 쇼핑센터에서도 만나게 된다. 어디서 만나든 반갑게 맞아주며 우리가 식당 할 때 베풀어준 친절에 감사한다.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만들어가고 우리는 또 살아간다. 바람이 불고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니 내 마음은 어느새 구름 따라 바람 따라 그 옛날로 돌아가 추억을 들춘다. 긴 세월 동안 좋은 날만 있지는 않았다. 까다로운 검사원이 와서 트집을 잡아 속상할 때는 당장에 관두고 싶기도 했고 남편이 급작스럽게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앞이 깜깜하고 막막했기도 했다. 손님이 많이 와서 돈을 많이 버는 날은 금방 큰 부자가 될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고 근방에 큰 도로공사로 길이 막혀 손님이 못 올 때는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태산 같기도 했다. 한겨울 크리스마스 전날 화장실이 막혀서 넘쳐서 애먹기도 했고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급히 한국에 가기 전날에 마지막으로 온 손님이 화장실에 큰 실례를 하고 가서 황당했던 일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은 날들이 생각난다.
좋고 나쁜 일 그리고 싫었던 시간도 이렇게 지나고 나면 그리워지는지 남편과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고 간혹 꿈속에서 장사를 할 때도 있다. 나를 스쳐간 모든 인연들은 보이지 않아도 만난다. 기쁨도 슬픔도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찾아온다. 좋다고 영원할 수 도 없고 싫다고 뿌리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인생을 걸어가는 길에는 고통도 만나지만 행운도 만난다. 고통이 행운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슬픔이 지나고 나면 그리움이 남기도 한다. 나뭇잎이 하나둘씩 물 들어가는 것을 보며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떠나는 여름이 아쉽지만 또 다른 여름을 기약하며 가을을 맞아야겠다. 뜨거운 여름도 좋았지만 아름다운 가을이 오는 길목에 서 있는 나를 자연은 축복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