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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그녀에게 행운을...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새벽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그치지 않고 하루 종일 온다. 한국에 가을장마 소식을 들었는데 이곳은 장마는 아니고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춥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온도가 많이 내려갔다. 하루 사이에 여름과 가을이 자리바꿈을 한다. 결코 가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간다는 소리도 없이 허망하게 떠났다. 계절은 시간을 놓치지 않고 온다. 하필 비가 오면 곳간에 곡식이 부족하다고 하는 '처서'에 비가 하루 종일 온다. 여름 내내 비를 기다렸는데 농부들은 지금 만큼은 비를 기다리지 않는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에 비가 오면 추수가 늦어지고 일 년 농사를 비로 인해 망칠 수도 있기에 비만큼은 피하고 싶은 농부의 마음인데 하늘은 때때로 그 마음을 몰라 주기도 한다. 무척이나 가물었던 올 한 해 동안 오지 않던 비는 가을을 데려다 놓는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고 언제 끝일 줄 모르는 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친구한테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비 오는 바깥만 내다보고 있었더니 "어디 있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라고 카톡이 왔다. 텔레비전을 보는 손주들과 그냥 앉아 있다고 했더니 시간 날 때 전화해달란다. 시간밖에 없는 나보고 시간 나면 전화하라니 당장에 전화를 했다. 여름 동안 어찌 지내는지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는데 이상하다. 잘 있는 게 아니고 잘못 있다는 친구의 대답이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일부러 만나지는 못 하고 우연히 산책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카톡으로 안부를 전하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동안 의사를 만나고 이런저런 검사를 하였는데 엊그제 암 선고를 받았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며칠 동안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서는 감사한 마음이 생겨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다고 한다.


워낙에 신앙이 돈독하여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잘해나가는 친구인데 갑작스러운 진단에 얼마나 힘들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요즘에는 수술을 하지 않고 암을 죽이기도 한다며 다행히 의사를 잘 만나서 모든 게 순조롭게 되는 것 같단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그 마음으로 이미 병이 반은 나았을 것 같다. 사람이 갑자기 나쁜 소식을 들으면 실망하고 절망하게 되는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 이민 초기에 아이들 기저귀 가방을 들고 다닐 때부터 알던 친구다. 같은 직종의 사업을 하며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조언을 하며 긴 세월 함께 걸어온 친구다. 남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오며 가며 찾아오고 먹을 것 챙겨주던 맘씨 좋은 친구다. 언제 만나도 웃음으로 대해주고 다정하게 말을 하며 틈틈이 챙겨주던 친구다.


힘들 때 따뜻한 두 손 잡고 위로하며 힘든 이민 생활을 동행하는 친구다. 사소한 것에 감사하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친구다. 그런 친구가 암에 걸렸다. 조기발견으로 수술하지 않고 항암치료를 한다고 한다. 요즘에 기술이 좋아져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며 나를 위로하는 친구다. 한마디 위로의 말도 못 하고 놀라고 있는 나를 진정시키는 친구다.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남을 통해서 들으면 기분이 언짢을 것 같아 직접 소식을 전한다는 배려 깊은 친구다. 좋은 소식이 아니라 미안하다는 친구다. 하느님이 부르면 언제든 가겠다는 친구… 아직은 아니다. 코로나로 식당 문을 닫고 정년퇴직을 했는데 젊어서 고생하고 이제 조금 허리를 펴는데 아직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알아 시기를 놓쳤지만 조기 발견했으니 조기 치료하면 된다.


치료하는 길이 힘이 들겠지만 그토록 힘든 이민 생활도 참고 살아왔는데 이겨내야 한다. 한평생 사는 동안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으로 쓰러질 것 같아도 가끔씩 찾아오는 기쁜 일로 고비를 넘기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새로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 태어나고 죽는다. 죽음이 무섭지만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희망의 내일이 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수없이 절망하고 실망하며 살아왔듯이 그렇게 이겨내면 된다.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오늘 내가 살았다고 내일도 산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은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처음이고 끝이다. 오늘은 이렇게 하루 종일 비가 오지만 내일은 내일대로의 날씨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이 오늘은 비록 아파하지만 내일은 또 다른 기쁨으로 웃을 것이다.


암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고 실망하며 슬퍼하고 풀썩 주저앉아 있을 친구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녀를 살릴 것이다. 절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그녀에게 힘을 줄 것이다.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녀는 새로 태어날 것이다. 하늘은 여전히 문을 닫지 않고 비를 쏟아낸다. 후회와 미련과 회한이 섞인 눈물이 비가 되어 흐른다. '오늘 우는 자는 내일 웃는 자' 되리니 오늘의 슬픔을 끌어안자.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겠지만 삶은 바다의 파도를 닮았다. 끝없이 움직이는 물결이 크고 작은 파도를 만들며 꿈틀 댄다. 높은 파도가 밀려와 풍랑을 만나기도 하지만 삶은 여전히 이어진다.


언젠가 끝이 될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 바다 위에서 춤을 추는 파도가 된다. 오늘 그녀의 배가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비틀거려도 내일 또 밝은 태양이 그녀를 찾아올 것이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그녀에게 행운을 기원한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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