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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오기 전에 텃밭을 떠나보낸다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여름과 가을이 자리바꿈을 하는 사이에 어리둥절하며 추석을 맞는다. 가는 세월이라고 쫓아왔더니 9월도 어느새 하순으로 접어든다. 너무 더워 여름이 싫다고 빨리 가라고 했는데 서리가 온다는 기상청 예보다. 얼마 되지 않는 텃밭 채소지만 서리 맞기 전에 추수를 해야겠다. 텃밭채소라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작 깻잎과 고추 그리고 호박인데 연 이틀 불어대는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서리가 내린단다. 여름내 상에 올라오던 깻잎과 고추를 조금이라도 더 자랄까 해서 더 놔두고 싶은데 도리가 없다. 고추는 고춧대로 따서 작은 그릇에 담아 놓고 깻잎과 고추 잎은 깨끗이 씻어서 소쿠리에 건져 물을 뺀다. 냄비에 물을 끓여 고춧잎을 삶아 찬물로 헹구고 씁쓸한 물을 빼려고 물에 담가 놓았다. 내일쯤 건져서 초고추장에 조물조물 무쳐 밥반찬으로 먹으면 아주 맛있을 것이다.


깻잎은 어느 정도 물이 빠져서 큰 그릇에 넣고 갖은양념으로 양념을 한다. 고춧가루 파 마늘 멸치액젓과 소금 약간의 참기름과 깨소금 그리고 설탕을 조금 넣어 김치 담듯이 살살 버무리면 깻잎이 서서히 양념을 빨아들여 차분해진다. 숨이 죽은 깻잎은 얼마 되지 않아도 입맛 없을 때 하얀 쌀밥에 하나씩 올려 먹으면 정말 맛있다. 유난히 깻잎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친정엄마는 내가 한국에 나갈 때는 영락없이 깻잎을 맛있게 만들어 놓으신다. 긴 여행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잘 못 자는 내가 유일하게 먹는 깻잎 장아찌다. 깻잎은 무엇을 만들어도 좋아한다. 무쳐도 좋고 찜을 쪄도 좋고 장아찌를 만들어도 좋아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깻잎이라서 봄에는 모종이 비싸도 사서 심는데 올해는 친구가 깻잎 모종을 잔뜩 가져다주어 이웃 들과 나누었는데도 농사가 잘돼서 여름 내내 잘 먹었다.


고추는 모종을 몇 개 사다 심었는데 너무 매운 고추라서 먹지 못하고 고추장아찌를 담았다. 장아찌는 밑반찬이라서 반찬이 시원치 않을 때 내놓으면 인기 만점이다. 매운 고추지만 이렇게 담가 놓으면 된장찌개 끓일 때 조금씩 넣어도 매콤한 게 맛있고 비빔밥 만들 때도 서너 개씩 넣으면 매콤 새콤한 맛에 밥맛이 살아난다. 같은 집에서 산 모종인데 매운 게 있고 안 매운 게 있어 반은 장아찌로 담고 밤은 고추장 찍어먹으니 맛있다. 해외 생활을 오래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갈수록 한국음식이 더 좋아진다. 양식도 좋지만 한식이 끌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일할 때는 마늘 냄새나 김치 냄새 때문에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은 아무 걱정 없다. 내가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면 된다. 코로나로 사람 만날 이유도 없고 이제 냄새난다고 조심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사진:이종숙)

인도 사람에게는 카레 냄새나고 서양사람에게는 치즈 냄새가 나는데 나에게 마늘냄새 김치 냄새 좀 나면 어떤가? 다행히 내가 아는 서양 친구들은 김치라면 사족을 못쓰고 없어서 못 먹고 안 줘서 안달이다. 이제는 김치를 사서 먹는 세상이라 그 누구도 김치 냄새 운운하지 않는다. 여러 나라 민족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데 서로를 알고 나면 그들의 음식도 이해하게 된다. 우리 옆집에 오랫동안 살던 중국인은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 좋았는데 몇 년 전에 새로 이사 온 인도 사람은 카레 냄새를 풍긴다. 처음에는 구수하다 생각했는데 너무 자주 냄새가 나서 역겹기도 하지만 문을 닫으면 된다. 그로 인해 내가 문제를 삼으면 그들 역시 내가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만들 때 역겨워 문제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서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도 지혜로운 삶이다.


지난겨울 호박을 사다 먹고 씨를 말렸다가 봄에 흙에 묻어 놓았더니 봄볕을 받고 모종이 잔뜩 나왔다. 이웃들과 나누고 몇 개 남은 것을 텃밭에 군데군데 심었는데 너무 가물었던 여름이라 잘 자라지 못했다. 그나마 사과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군데군데 몇 개 열린 호박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기특했다. 준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는데 자란 게 신통해서 예쁘다 했더니 잘 자라 주었다. 앞으로 며칠 더 놔두면 조금 더 자라겠지만 서리가 오기 전에 잘라서 집안으로 데려왔다. 연한 것은 두부 넣고 새우젓 찌개를 해 먹었더니 입에서 살살 녹는다. 몇 개 남은 것은 볶아 먹든지 쪄 먹든지 해도 맛있을 것 같다. 여름내 물 주고 꽃이 피면 요리조리 들여다보면서 사진 찍어 주었더니 고마운지 가을에 호박을 선물로 주고 간다.


가을이 이렇게 가면 겨울이 덩달아 온다. 하얀 눈이 쌓이고 텃밭은 그동안의 노고를 달래며 겨울잠을 잘 것이다. 눈이 녹고 꽃이 피는 봄이 오면 텃밭도 기지개를 켜며 다시 땅을 열 것이다. 오고 가는 계절 속에 조금은 쓸쓸한 가을을 맞고 보내며 또 다른 계절을 향해 간다. 가을이 있기에 겨울이 오고 겨울이 있기에 봄을 기다리는 우리네 삶이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니 텃밭이 허전하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부지런한 남편은 텃밭을 갈아엎을 준비를 한다. 땅속에서 볕을 보지 못한 흙을 위하여 한번 뒤집어 주면 해충 방지에 좋다고 한다. 서리가 온다는 소리에 엉겁결에 추수를 하고 나니 이제는 눈이 와도 걱정 없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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