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먹고 놀다 나중에 어쩌려고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느지감치 일어나 아침이라고 먹고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앉아서 뉴스 보며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늘이 구름이 꼈네, 바람이 부네, " 라며 시시한 말을 하며 멍청히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눈은 텔레비전을 향하고 있는데 머릿속은 딴생각을 한다.
"오늘은 어디를 갈까?"
"점심은 무엇을 해 먹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뉴스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한 가지 일만 하지 능력도 안되는데 한꺼번에 여러 가지 하려고 하니 아무것도 안된다.
노는 것도 힘들어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아이고 지구'를 연발한다. 노인들의 헛소리인 줄 알았던 신음 소리를 나도 하고 있으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등에 담이 들어 오른쪽을 사용하지 못하고 며칠 살았는데 가만히 놓아두니까 심심했던지 어딘가로 가버렸다. 병도 대접을 안 해주니까 나가 버렸다. 핸드폰 보는 것도 시시하지만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까 이것저것 들여다본다. 별것도 아닌데 시끄럽게 떠들어 대어 시간이 아까운 것 투성이다. 안 보자니 심심하고 보자니 재미없다.
아침 먹은 설거지가 싱크대에 갈 대자로 누워있다.
'어떻게 좀 해달라'는 기세다. 손가락을 많이 움직여야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지만 설거지는 설거지 기계에 집어넣는다. 손가락 쓸 일도 많은데 굳이 설거지까지 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설거지는 잘하는 남편이지만 그릇이 밖에 나와 있는 것을 싫어하는 남편이 쫓아다니며 여기저기 집어넣어서 싱크대가 깨끗하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각자 할 일을 한다고 간다.
하나는 화장실로 가고 하나는 소파에 앉는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큰 일이나 하는 것처럼 바쁘다. 시간은 말없이 가는데, 다시 돌아올 시간이 아닌데 그냥 가게 놔둔다.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인 것을 알지만 가나보다 하며 모른 체한다.
"괜찮다. 어차피 가야 할 시간이라면 그냥 보내자." 혼자 구시렁거리며 여전히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돌려가며 본다.
봐봤자 머리에 남지도 않는 것들인데 뭐하러 열심히 시간 들여서 머리 쓰고 보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볼일을 다 보았는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준비 다 됐어?"
"네."
"어디로 가지"
매일 가는 데로 가면 될 텐데 물어본다.
"그냥 가까운 데로 가요."
"다른데 가봤자 그게 그건데…".
"그럽시다."
매일 가서 그런지 간혹 다른 데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숲이 다 거기서 거기다.
나가기 전에 점심때 오면 먹을 밥을 눌러놓고 나간다.
갔다 오면 배가 고플 텐데 밥이라도 있으면 뭐라도 해 먹으면 되니까 밥은 필수다. 빵을 아침에 먹었으니 점심에도 빵을 먹을 수는 없다. 나야 괜찮지만 남편은 한식을 좋아하니 찌개나 하나 만들어서 먹으면 된다.
어디 대단한 회사로 출근이라도 하러 가는 것처럼 급히 나간다.
(사진:이종숙)
하늘은 구름이 껴 있고 나무들은 물들어 길거리가 노랗다. 엊그제 추분이었는데 올해는 가을이 더 빨리 온 것 같다. 여기저기 울긋불긋 난리가 났다.
결국 말라가고 죽어가는 모습인데 멀리서 보면 예쁘다고 사진을 찍는다. 너무 예뻐서 나중에 한번 더 보려고 찍지만 다시 보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숲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는지 급하게 가서 걷는다. 해가 구름에 가려있다. 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간다. 잡풀들이 힘없이 쓰러져 있고 낙엽이 오솔길을 덮었다. 천지사방이 울긋불긋해서 어지럽다.
거의 매일 가는 길이라 눈감고도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열심히 땅을 보며 걷는다. 길가에 나무뿌리들이 얼기설기 나와 있어 잘못하면 걸려 넘어진다. 조심조심 한발 한발 걸어간다. 며칠 전에 숲 속으로 들어가서 발을 헛디뎌서 뒤로 맥없이 자빠졌다. 다행히 뒤에 아무것도 없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놀랬다. 사고는 언제나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생긴다. 방심하면 안 된다.
해가 구름을 벗기고 세상을 비춘다. 나무 사이로 구석구석 들어온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나뭇잎과 색이 같은 버섯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식용인지 독버섯인지 모르니 그냥 간다. 알지 못하는 것은 먹으면 안 된다. 아는 것만 먹어도 다 못 먹는데 모르는 것까지 먹을 필요 없다.
비가 와서 인지 계곡에 물이 제법 많다. 낙엽들이 계곡물을 따라서 간다. 숲은 요지경이다. 봄이 오듯이 새로 자라는 풀들이 있고 여름처럼 푸른 나무도 있다. 반쯤 물든 나무도 있고 다 떨어뜨리고 발가벗은 나무도 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피어나고 힘을 다해 살아간다. 힘이 다하면 기대고 쓰러지고 누워도 숲을 지키는 나무들이 산다. 매일이 같아도 살아가다 보면 재미있듯이 매일 오는 숲이 참 좋다. 같은 듯 다르고 매일이 새롭다.
겨울을 벗어내고 황량하게 서있어도 봄이 온 것을 알고, 봄이 가도 여름과 함께 하는 것을 안다. 가을을 앉혀놓고 가버린 여름이 아쉽지만 아름다운 가을의 달콤한 속삭임에 취해 어느덧 여름을 잊는다. 일하던 시절을 잊고 노는 게 내 일상이 되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파란 하늘이 계곡에 빠진 걸 본다.
참 예쁘다. 계곡에서 낙엽과 함께 논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또한 다를 바 없다. 노는 것도 힘이 드는지 낮잠을 밤잠처럼 잘 잔다. 꿈도 꾸고 코도 골며 잔다. 자다가 가는 줄도 모르게 잔다. 낮잠을 신나게 자고 일어나면 무언가 할 일이 보인다. 살림이라는 게 끝이 없다. 빨래 거리, 청소, 밥해먹고 치우는 것, 노는 즐거움과 사는 즐거움이 넘친다.
매일 아침 이래도 좋은가 하면서 논다.
먹고 노는 재미로 산다
그동안 일하며 살았으니 놀며 살아도 된다.
어제처럼 오늘처럼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바란다.
일할 때는 놀기를 바랐는데 놀다 보니 노는 게 삶이 됐다.
노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잘 논다.
잘 먹고 잘 노는 게 자식들한테 효도? 하는 것이라는 세상이다. 그냥 놀자. 마음 편하게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