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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나선 길에서 만난 행복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어딘가 떠나고 싶다. 그런데 막상 갈 곳이 없다.

가을이 떠나려고 하는데 잘 가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다. 가을 병이 도졌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나선다. 가까이 살고 있는 친구네로 향한다.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다. 틈틈이 우리를 챙겨주는 그 친구가 사는 곳으로 가면서 들판에 있는 가을을 만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여기저기 굴러 다닌다.

집에서 10분 정도 빠져나오니 어느새 한적한 들판으로 이어져 고속도로를 달린다. 시원하다. 차들이 앞으로 뒤로 달리고 황금빛 가을은 차도에 서서 반갑다고 손짓한다.

잠깐만 시간을 내면 이렇게 아름다운 들판을 볼 수 있는데 못하고 산다. 어느새 추수가 끝나서 들판은 황량 하지만 농부들의 평화가 보이는 듯하다.

일 년의 농사를 조바심하며 힘겹게 짓고 가을에 일 년의 수확을 거두어들인 농부는 날아갈 듯 좋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농부들의 근심이 크지만 지금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곤경이다. 여름 내내 가뭄으로 마음까지 타들어 갔을 텐데 그나마 9월 한 달 비나 눈이 오지 않고 날씨가 화창해서 추수한 사람들은 한숨 놓았을 것이다.

이곳의 가을 날씨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8월 중순에 눈이 오고 9월에 많은 비가 와서 농사를 망쳐놓기도 하는데 다행히 올해는 특별한 것 없이 가을을 잘 넘기고 있다. 추수를 하지 못한 엄청나게 큰 옥수수밭이 보인다. 언제 추수를 할 것인지 보는 내가 걱정이다. 이러다가 갑자기 날씨가 춥거나 눈이라도 오면 농사를 망치는데 하루빨리했으면 좋겠다.

(사진:이종숙)

나무들이 노랗게 물이 들었는데 잔디는 아직도 새파랗다.

새로 봄이 오는 것처럼 풀들도 자라고 한 군데는 샛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유채밭도 보인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간다.

들판을 바라보며 가는 길은 희망이 보인다. 겨울이 오면 흰 눈이 쌓이고 눈이 녹으며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봄을 맞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저 넓은 들판에는 꿈이 있고 도전이 있고 삶의 지혜가 있어 좋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산지 오래다. 이렇게라도 가서 만나지 않으면 못 만난다.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은 즐겁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이것저것 챙겨서 가져다주고 만나서 반갑고 같이 있어 좋은 친구다.

간다는 소리 없이 가면 깜짝 놀라 좋아하는 모습을 그리며 간다. 하늘은 파랗고 내 마음도 파랗다.


(사진:이종숙)

물가에 오리들이 앉아서 놀고 기러기는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 남쪽을 향한다. 수십 마리가 하늘에 줄을 그으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힘들게 찾아가는 그들의 새 보금자리에서 평안하기를 바란다. 앞에서 날다가 뒤로 처지고 뒤에서 오다가 앞으로 날아가며 먼길을 간다. 가다 보면 아프기도 하고 죽기도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날아간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사느라고 고생이 많다. 죽은 사람은 죽어서 불쌍하고 산 사람은 고생하며 산다. 생각하면 쉬운 일이 없다. 죽음을 앞두고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하루라도 더 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으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죽고 사는 게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들판에서 노는 소들이 무심히 풀을 뜯고 있다. 그들도 겨울이 오는 것을 아는 듯이 지나가는 우리를 쳐다본다. 바라보는 입장은 평화롭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하루 종일 서성이는 그들은 힘들다. 먹고 살기 위해 참아야 한다.

싫어도 좋아도 견뎌야 한다.

커다란 곡식 창고도 보이고 기름통도 보인다.

먼저번에 보았던 낡은 식당이 새롭게 단장한 모습이 보인다. 한때는 바빴던 곳이 세월 따라 새로운 주인을 맞고 떠나보내며 누군가의 새 터전이 된 것 같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물속에 하늘을 안고 있다. 물이 마른 호수는 소금밭으로 변하여 눈처럼 하얀 모습을 하고 있다. 노란 나무가 호수 주위에 자라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오후에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네 주유소가 보인다.

14년을 한결같이 한 군데서 장사를 하며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그들이 대견하다.

단풍구경이 하고 싶다는 친구의 말이 들린다. 하루 종일 일 하고 문 닫을 시간이 되면 깜깜해서 예쁜 단풍을 못 본다고 한다. 그나마 동네에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를 보며 가을의 낭만을 즐긴다고 한다.

젊을 때 일하느라 바빠서 봄인지 가을인지 모르고 살던 때가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 인생의 가을을 만나니 세상의 가을도 구경하며 산다.

세상사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안타까움 속에서 살다 보면 계절을 만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활짝 웃는 얼굴이 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눈이 커진다. 진한 포옹으로 반가운 마음을 전한다. 행복은 거기에 있고 사랑의 꽃이 피어난다.

한 시간을 달려가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는 시간은 짧지만 기약하며 떠난다.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삶이 아쉽지만 돌아가야 할 집으로 향한다. 잠깐의 만남으로 가을을 전하고 돌아가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황금빛 석양이 펼쳐져 있는 하늘이 곱다. 갈 곳이 있다는 것,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를 만나는 것이 행복이듯이 오늘이 간다. 생각지 못한 방문으로 행복했던 하루는 아름다운 석양 안에 물들어 간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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