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쏟아진 눈이 며칠 동안 얼고 녹고 를 반복한다. 겨울이라고 매일 추운 것이 아니라서 계절도 갈피를 못 잡는다. 신선한 눈이 왔을 때는 설국에 온 것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눈이 주저앉아 며칠 전에 그렇게 추웠던 날씨가 풀려서 지붕의 눈이 거의 다 녹았다. 길거리에 쌓여있던 눈도 녹아거리는 빙판으로 변한다. 소금이나 모래를 뿌려놓아도 밤낮의 온도 차이가 많아 여전히 얼음길을 걸어야 한다.
며칠 동안 미끄러운 길 핑계로 산책도 나가지 않고 창밖만 바라본다. 겨울이 앙상하게 서있다. 가을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겨울은 깊어만 간다. 온도가 오르내려도 겨울은 겨울이기 때문에 세상은 쓸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봄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벌써부터 봄을 기다린다. 봄이 와도 세상은 달라질 것 없는데도 봄이 오면 더 좋을 것 같다.
어디라도 나가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나가야 한다. 산책을 나가서 30분쯤 걷다 보면 아무리 추운 날도 땀이 나는데 30분을 견디지 못해서 두껍게 입고 나가면 늘 후회를 하면서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나 처음이 힘들지 시간이 가면 다 좋아지게 마련인데 겨울은 도통 적응이 안 된다.
아플까 봐 걱정하면서 어제 부스터 샷을 맞고 왔다. 맞기 전에는 후유증에 대한 이런저런 망측한 소문 때문에 망설이다 결국 맞았는데 다행히 괜찮다. 주사 맞은 부위만 조금 뻐근할 뿐 밤에도 잠을 잘 잤다. 주사 맞을 때 약사에게 지난번에는 너무 많이 아팠다고 말하면서 이번에는 안 아프게 요술도 집어넣으라고 말하며 한바탕 웃었다. 정말 이번에는 감쪽같이 전혀 아프지 않아 다행이다. 지난번 혈액검사를 했을 때 철분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동안 철분약을 꾸준히 복용해서 인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바람 한점 없는 뜰에 까치가 눈 위를 걸어 다닌다. 먹을 것도 없는데 무얼 먹고 겨울을 나는지 모르겠다. 한국 같으면 이맘때 산에 감도 있을 것이고 돌배도 있을 텐데 삭막한 이곳은 풀조차 보이지 않는다. 가을에 따다가 몇 개 남겨둔 사과가 나무에서 말라가고 있는데 어쩌다 한 번씩 와서 찍어 먹는다. 죽은 듯 보이는 나무들은 어느새 봄을 준비하고 있다.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소나무는 작년에 가지마다 수만 송이 꽃을 피더니 유난히 푸르다. 그 옆에는 몇 년 전에 시집을 온 개나리 나무도 제법 자라서 지난봄에는 꽃을 많이 피웠다.
담 넘어까지 긴 가지를 내리고 서 있는 라일락 나무는 개나리 나무와 손을 잡고 함께 겨울을 내고 있다. 사과나무는 혼자서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하나를 더 사다 심었는데 해마다 식구들에게 사과를 공급해 준다. 사서 먹는 사과보다는 작지만 서리를 맞고 단맛을 낸다. 올해는 가을이 길어 알이 굵어져서 제대로 된 사과맛을 보여주었다.
마가목 나무가 새빨간 열매를 달고 새들을 유혹한다. 까치와 참새 그리고 로빈과 블루 제이가 마가목 나무를 지키며 오르내리며 숨바꼭질을 한다. 우리 뜰에 사는 새들도 가족이 되었는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노는 모습이 보기 좋다. 까치들이 놀다 가면 참새들이 놀러 오고 로빈이 다녀가면 블루 제이가 날아온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보면 도시가 아닌 어느 깊은 숲 속의 별장에서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는 굳이 공원이나 놀이터로 가지 않고 산다. 뜰이 넓어 아이들이 뛰어놀고 피크닉 테이블을 놓고 바비큐를 하면 공원이나 다름없다. 아이들 생일날에는 동네 친구들을 불러서 피자도 먹고 게임을 하던 생각이 난다.
여름에는 물총을 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겨울에는 눈으로 에스키모 집을 만들며 추억을 쌓던 집이다. 이제 아이들이 자라고 손자 손녀들이 뛰어노는 놀이터가 되었다. 그네가 있고 해먹이 있어 앉아서 놀고 힘들면 누워서 잠을 자는 뒤뜰이다. 더운 날 온 식구가 모여서 고기도 구워 먹고 뷔페 식으로 반찬을 늘어놓고 밥을 먹으면 시원하고 맛도 더 있다.
하얀 눈으로 덮인 뜰을 바라보며 지난여름이 생각난다. 큰아들 식구가 와서 두 달 동안 있었다. 재택근무로 일도 하고 손주들이 신나게 뛰어놀았다. 가까이 사는 둘째 아들 식구들도 거의 매일 와서 합류하여 대가족이 매일매일 잔치를 했다. 음식도 많고 뜰이 넓으니 자유롭게 물장난하며 여름을 보내고 갔던 여름이 다시 그리워진다.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했던 이유로 아이들과 함께한 남편과 나는 행복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그나마 여행도 못하고 만남도 할 수 없었던 코로나가 준 커다란 선물이다.
손주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데 예쁜 나이를 놓치지 않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마침 우리 집 길 건너에 학교가 있어서 손주들은 아침 먹고 뒤뜰에서 조금 놀다가 운동장에 가서 놀다 점심을 먹으러 온다. 아침 내내 뛰어놀던 아이들이 배가 고파 투정도 안 부리고 꿀맛 같은 점심을 먹는다. 식사 후 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여름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또래 아이들과 앉아서 공작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싸 가지고 간 간식을 먹으며 집으로 온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가고 여름도 가버렸다. 지나고 나니 추억만 남는다. 눈을 감고 있으면 올망졸망한 손주들이 눈에 선하다. 눈 덮인 뒤뜰을 쳐다보며 생각으로 지난여름에 다녀왔다. 이제 시작된 겨울이 하루 이틀 가다 보면 봄도 멀지 않다. 잠깐씩 쉬어가며 그리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겨울이 고맙다. 겨울이 없다면 봄과 여름을 기다리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앙상한 겨울이 더없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