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난로에서 장작불이 활활 탄다. 유난히 오랫동안 계속되는 한파와 폭설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벽난로 앞에서 불멍 하는 게 일상이 되어간다. 흐르는 물을 보면 한없이 따라가고 싶은데 불타는 것을 바라보면 생각의 골짜기로 달려간다. 불속에서 피어나는 추억은 여기저기 나를 데리고 다닌다. 친구들과 캠핑 가서 캠프파이어를 피우고 놀던 때가 생각난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밤을 새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원히 함께 갈 것 같던 그 친구들이었는데 지금은 소식조차 모른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인간들의 관계이지만 옛날에 알고 친하던 사람들은 이제 추억의 사람들이 되었다. 코로나로 성당조차 가기 힘들어지면서 만나는 횟수가 더 뜸해지고 자주 만나지 않다 보니 궁금한 마음 역시 없어진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온 올 겨울이다. 뜰안에 잔뜩 쌓여 있는 눈은 봄이 와도 녹을 것 같지 않다. 2022년 새해가 온다고 알게 모르게 기대하며 흥분했던 연말연시는 이렇게 집안에서 둥글 거리며 불장난을 하며 하루하루 지낸다. 이곳의 겨울은 춥고 길어서 감히 바깥 활동을 생각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활동 범위를 찾아야 한다. 웬만큼 추우면 산책이라도 가서 잠깐씩 걷고 오면 건강상 좋고 기분도 좋아지는데 영하 30도에 가깝고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에 가까운 무서운 추위에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상 집에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 외에는 없다. 해마다 긴 겨울이 싫어서 따뜻한 곳으로 가서 겨울을 지내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나마도 코로나가 방해를 해서 못한다. 한번 국외로 나가면 들어올 때 여러 가지 검사와 절차가 까다로워서 나이 든 사람들은 체념하고 산다.
성당에서 나름대로 해외여행을 계획하여 해마다 이맘때쯤 여행을 하며 즐거웠는데 코로나로 그마저도 막혔다. 뉴스를 통해 보니 새해 전야에 여러 사람이 비행기를 전세 내어 멕시코로 여행을 간 그룹이 있다. 비행기 안에서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고 먹고 놀던 사람들이 SNS에 노는 사진을 올리며 알려진 사건이 있다. 어찌어찌해서 도착지까지는 갔지만 방역지침을 어겨서 비행기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되었고 다른 여행사에서 그들을 받아주지 않게 되어 그곳에 발목이 묶인 그들은 어찌 될지 모른다. 코로나로 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낸 특별한 여행이었을 텐데 복잡하게 됐다.
불 앞에 앉아서 생각은 50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방으로 간다. 할머니 방에는 작은 화로가 있었고 할머니는 화롯불을 살살 다독이며 안에 있는 밤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맛있게 구워서 한쪽으로 내놓으시고 우리는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까먹던 시절로 돌아간다.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시던 할머니는 담배 한번 빨고 화로를 뒤집고 다시 한번 담뱃대를 빠시던 생각이 난다. 어느 여름날, 할머니는 곱게 차려입고 할머니 남동생을 방문하러 간다며 행복해하시던 모습도 생각나고 돌아가신 뒤에 병풍 뒤에서 살아계신 듯 누워 계시던 모습도 보인다. 상여 길을 따라가며 할머니를 애타게 부르며 울던 생각도 나고 엄마가 아플 때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기억도 난다.
지나간 세월이 남겨주고 간 여러 가지 추억들이 불꽃에 다시 살아나 그때로 가본다. 어렸던 나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고 날마다 조금씩 삶을 정리하며 산다. 그저 나무가 타고 있는 불꽃일 뿐인데 불꽃에는 정말 여러 가지가 보인다. 보고 싶은 아이들이 보이고 만나지 못한 부모형제가 보인다. 추억은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지나가 다시 만날 수 없는 순간들은 아름다운 색으로 꽃이 되어 피어난다. 불꽃에서 피어나는 지난날들은 그리움으로 우리를 만나게 한다. 각자 사느라고 잊혔던 모든 것들은 벽난로 불꽃으로 다시 만난다. 활활 타던 불꽃은 욕심을 내려놓고 차분히 탄다. 나도 불같던 마음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마음이 된다.
하나 둘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은 이렇게 찾아와 위로한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에 나타나고 아름답게 물든 단풍 진 숲 속에서도 만난다. 하얗게 내린 눈 쌓인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고 지붕에 매달린 고드름에도 보인다. 계절 속에서 자라나는 사랑은 인연으로 묶어진 사람들과 이어진다. 추워서 보이지 않던 까치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날씨가 따뜻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봄은 아직 멀었지만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서 쌓인 눈을 조금이라도 녹이면 좋겠다. 계절이 알아서 하는 일인데 욕심 많은 나는 또 참견한다. 때를 알고 오고 가는 계절을 믿고 기다려보자. 아무리 안달해도 자연은 자연의 할 일을 한다. 산불이 나서 온통 다 태워버린 미국 어느 지역에 폭설이 와서 화염을 다 덮어버렸다. 인간이 똑똑해도 자연을 이길 수 없고 앞서지 못한다. 딸이 사는 빅토리아에 눈이 20센티미터가 왔단다. 해마다 2월이면 꽃이 피는데 그 많은 눈을 이길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겨울이 없던 곳에 한파가 밀려오고 눈을 구경하지 못하는 곳에 폭설이 오는데 이곳의 겨울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춥다. 눈이 잘 오지 않아 첫눈이 오면 명동 어느 다방 앞에서 만나자고 했던 여고 동창들과의 약속은 추억이 된 지 반 세기가 되어간다. 세상이 변하고 세월도 가고 자연의 몸부림 속에 세상에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음을 알고 불꽃을 보며 추억의 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