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와서 나를 깨운다. 하루가 시작된지도 모르고 잤는데 하루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린다.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아무것도 안주는 내가 뭐 그리 좋다고 매일매일 찾아와 하루라는 시간을 주고 가는지 생각할수록 고맙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덥석 덥석 받기만 하는데도 화도 내지 않고 오는 하루에게 미안하다. 오지 않아도 할 말이 없는데 꼬박꼬박 찾아오는 하루는 오늘도 나를 찾아왔다. 혼자 온 게 아니고 참새들의 수다 소리와 눈부신 태양과 함께 왔다. 창밖을 본다.
간밤에 소나무 아래에서 자고 나간 토끼 발자국이 눈에 선명하게 찍혀서 밤사이의 안부를 전한다. 추운 날 눈을 맞고 서있는 나무들도 여전히 잘 있다고 손을 흔든다. 봄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나무들은 벌써부터 봄을 맞기 위해 알게 모르게 속으로 준비한다. 눈이 쌓여있어 추운 곳에 서있는 등 굽은 노송은 며칠 동안 내리쬐는 햇빛으로 눈을 다 털어버리고 연 초록의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유난히 곱다. 앞으로도 몇 번은 눈 폭탄을 맞을 텐데 봄을 기다리며 서있는 소나무가 기특하다.
작년 여름에 예쁜 소나무 꽃까지 피어 놀라게 하더니 정말 부지런하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알아서 계절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연이 참 신기하다. 33년 전,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코너에 서 있던 작은 소나무가 마치 우리 집을 보호하듯이 멋지게 자랐다. 뜨거운 여름에 물 한 방울 주지 않고 추운 겨울에 담요 한번 덮어주지 않았는데 고맙게도 잘 자라준다.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커튼만 열면 보이기 때문에 노송을 보며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한다. 비가 오면 비 방울을 떨어 뜨리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이 집과 함께한 세월이 48년이다. 15년 된 집을 사 가지고 우리와 33년을 살았으니 긴 세월 동안 함께 하며 집을 감싸 안듯이 서있다. 너무나 멋지게 자라 의젓하게 서있어서 동네에서도 명물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척 예뻐하며 부러워한다. 유난히 뜰에 나무가 많아 굳이 공원에 가지 않아도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과 함께해서너무 좋다.
몇 년 전 병들어 죽어 잘라버린 전나무 자리에는 개나리 나무가 자리를 잡고 옆에 서있는 꺽다리 라일락 나무와 손잡고 논다. 라일락 나무는 사과나무와 키재기를 하고 앞에서 애교쟁이 장미나무와 사랑을 주고받으며 원추리와 사이좋게 살아간다. 지금은 눈 속에서 꿈을 꾸고 있지만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원추리가 피면 세상은 일제히 봄 잔치로 들썩거린다. 꽃샘바람이 심술을 부리고 겨울이 가기 싫어 때늦은 눈을 뿌려도 땅을 헤집고 나오는 봄을 막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앵두꽃이 피었다 꽃이 질 때에 사과꽃이 빨갛게 피어난다. 겨울이 남기고 간 얼은 땅에 봄은 그렇게 찾아온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참새들 수다 소리로 시작된 하루를 바라보며 어느새 나는 오지도 않은 봄 생각으로 봄을 맞고 있다. 하얗게 쌓인 눈이 아직 멀었다며 꿈도 꾸지 말라고 웃는다. 어쩌면 봄은 보이지 않는 겨울 안에 있을 것이다. 기다리는 마음속에 봄이 오고,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속에 계절은 간다. 하루를 살듯이 긴 세월을 살고 우리는 세월 따라 계절처럼 왔다 간다.
삶은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다. 언젠가 가고 싶은 곳을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산다. 하얀 눈 밑으로 오는 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다 보면 봄은 온다. 봄이 온다고 달라질 것 없는데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아마도 봄은 우리들의 희망 같은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오지 않았기에 기다리고 가지 않기에 가기를 바란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는데 하얀 눈 위에 그제는 비가 오더니 밤새 눈이 오더니 이틀 동안 엄청 춥다.
눈 위에 비가 오면 눈이 녹으며 빙판을 만들고 그 위에 눈이 내렸으니 집안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길이 미끄러우면 넘어지고 다치면 큰일이다. 해마다 겨울에는 순간의 실수로 다치는 사고가 수도 없이 난다. 아픈 것도 힘드는데 나을 때까지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 눈이 많이 오고 추운 것은 싫지만 겨울이 따뜻해서 빙판을 만드는 것은 더욱 싫다. 저 많은 눈이 녹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때아닌 비가 오고 눈까지 왔으니 한심하다.
오늘은 영하 23도인데 내일은 영상이 된다고 한다. 고집스럽고 변덕스러운 이곳의 겨울 날씨는 시도 때도 없이 추웠다 더웠다 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고 눈이 오면 빙판이 되어도 견디며 사는 게 삶이다. 싫다고 물릴 수 없고 힘들다고 건널 뛸 수 없는 것이다. 내게 온 하루는 좋든 싫든 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 참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시작된 나의 하루는 오지 않은 상상의 봄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