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것과 내게 온 것을 사랑하며 산다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세상은 회색이다. 해를 숨긴 하늘이 시치미 떼고 모른척한다. 언제 해를 내놓을지 아무런 말도 없이 하늘을 덮고 있다. 무심한 하늘은 어제저녁 때부터 눈을 뿌리고 바람을 재운다. 해 뜰 시간인데 해는 뜨지 않고 구름 뒤에서 게으름 피고 새벽부터 즐겁게 짓던 새들은 어디를 나갔는지 몇 마리만 남아서 나무를 지키고 있다. 오늘 하루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세상은 고요하다. 오고 가는 차들도 없고 멀리서 아이 하나가 가방을 메고 학교로 걸어가고 있다. 파랗고 하얀색을 넣어 손으로 짠듯한 털모자를 쓰고 검은 회색의 목도리를 흔들며 열심히 걸어간다. 조금 떨어진 뒤에서 다른 아이 하나가 급하게 걸어간다. 학교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학교 근처가 조용하다.


부엌 창문을 열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와 오늘 같이 눈 오는 날은 커튼을 열고 나 혼자 구경한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에 어쩌다 한두 개의 차들이 오고 갈 뿐 오늘은 그 흔한 개도 짖지 않고 조용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버스에서 사람들이 오르내리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전철이 운행할 계획이라서 버스 정류장은 없어졌다. 이 집을 살 때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이 집 가까이에 있으면 안 좋다고 해서 살까 말까 망설이다 샀다. 바로 우리 집 옆도 아니고 길 건너 앞집 옆에 있기 때문에 별 지장이 없었고 오히려 버스를 타고 어디라도 갈 때는 너무나 편해서 좋았다.


버스 정류장조차 없으니 동네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만 해도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자라서 집을 떠나고 나이 든 노인들만 사는 집이 많아졌다. 이 집을 사기 전에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이사할 때마다 너무나 고생스러워서 집을 사는 날 앞으로 절대 이사하지 않을 거라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33년을 살고 있다. 살다 보면 싫증이 나고 새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만도 한데 살수록 정이 드는 집이다. 아이들과 함께 살 때는 더 좋고 큰집으로 이사를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여러 번 집 구경을 가보기도 했다. 가서 보면 겉은 화려하고 신식이라 좋아 보이지만 무언가 불편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느끼곤 했다.


(사진:이종숙)


우리 집은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뜰이 넓어 좋은데 새로 지은 집들은 집은 크고 넓어 좋아도 나무도 얼마 없고 뜰이 작아서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지고 나무들은 무성한 잎을 만들고 가을에는 멋진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눈 쌓인 뜰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문을 열고 나가면 여러 가지 새들이 날아와 함께 놀고 계절마다 알아서 해마다 피는 꽃들을 바라보면 마냥 행복하다. 오랜 세월을 살아도 나날이 다른 모습으로 저마다의 할 일을 하는 자연 속에서 살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부엌문을 열고 나가면 오래된 앵두나무가 있다. 봄이 오면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봄을 알린다. 성급한 앵두나무는 해마다 꽃샘추위에 눈을 맞고 얼면서도 체념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몇 년 전에 꽃이 만발하여 앵두가 많이 열릴 것 같아서 좋아했는데 밤사이에 내린 눈으로 꽃이 얼어 앵두가 몇 개밖에 열리지 않았다. 어찌나 속이 상한지 눈을 원망했는데 작년에는 꽃도 만발하고 눈이 오지 않아 앵두도 많이 달려서 앵두주를 담았다. 아이들이 아끼는 술인데 일부러 소주를 사다가 담느니 병에 마시다 반쯤 남아있는 보드카로 담았더니 아이들이 비싼 술을 없앴다고 속상해했다. 그래도 앵두주는 약술이라 몇 년 뒤에 마시면 몸에 좋으니 걱정 말라고 하며 잘 모셔 놓았다.


(사진:이종숙)


앵두나무 앞에는 사과나무 두 그루가 있어 예쁜 꽃도 피고 맛있는 사과를 먹으니 일석이조다. 연분홍 꽃이 피는 봄에는 온 동네가 화사하게 눈이 부시고 가을에는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오가는 사람들이 따먹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나눠먹는다. 서리가 내려야 맛이 나는 사과라서 늦가을에 추수를 하는데 달고 시원해서 맛있다. 지난해는 더 많이 열려 나눠먹고 일부는 껍질을 까서 살짝 삶아 냉동고에 얼려서 필요할 때 꺼내서 케이크도 만들고 사과 파이도 만들어 먹는다. 아직은 눈이 와서 보이지 않지만 머지않아 장미와 함께 사는 부추가 땅을 비집고 나오고 있다. 겨울을 견디고 새로 나오는 부추는 그 무엇보다도 몸에 좋고 맛있다. 눈 오는 밖을 보며 오는 봄을 생각하니 눈이 정겹고 좋다.


회색으로 물든 세상이지만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밤새 내린 눈이 나무들 가지 위에 쌓여 있고 해는 구름 속에서 쉬다가 곧 나올 것이다. 아침내 떠들다가 놀러 나간 새들도 돌아왔는지 시끌시끌하다. 까치가 참새와 놀고 로빈과 블루 제이가 날아다닌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우리 집 뜰을 찾아오는 새들이 고맙다. 소나무 위에도 전나무 위에도 하얗게 눈이 쌓였다. 이렇게 눈이 올 때는 꽃피는 봄을 생각하며 추억에 젖고 한여름 더울 때는 오늘 같은 날을 생각하며 산다. 눈이 온다고 걱정하고 싫다고 할게 아니고 좋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어차피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게 인생이니 내가 가진 것과 내게 온 것을 즐기며 살기로 하니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더욱 사랑스럽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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