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유행가 가사 같은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 하면서도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한번 선택한 길은 자신의 책임이다. 좋아서 한 선택이 생각한 결과보다 만족스럽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따라 걷다 보면 깊은데도 있고 얕은데도 있다. 바람이 불어 눈을 많이 데려다 놓은 곳도 있고 어디론가 다 날려 보낸 곳도 있다. 바람이 한 일이기에 원망할 수 없고 깊은 곳에서는 빠지고 얕은 곳에서는 편안하게 걷는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이 다르기에 새로운 것은 길을 걸으며 자연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제는 눈이 펄펄 내려서 눈앞이 보이지 않아 코트에 달려있는 모자까지 쓰고 걸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청명하지만 바람은 쌀쌀하다.
날씨에 따라, 몸상태에 따라 다르고 기분에 따라 걸어가는 마음도 다르다. 걸을 수 있음에 고맙고 같이 걸어주는 남편에게 감사한다. 때로는 걸으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하루 이틀 쉬다 보면 다시 걷고 싶어 진다. 오늘도 나는 산책로 입구에 있는 삼거리에서 갈등을 한다. 큰길로 갈까 아니면 오솔길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 닿는 대로 발길을 옮긴다. 오솔길은 높고 낮아 가파르고 험하여 위험하지만 싫증이 나지 않고 넓은 산책로는 밋밋하여 편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만나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편한 길을 걷다 보면 오르 내림이 없어서 무료하여 중간에 오솔길로 연결된 길로 들어가면 같은 숲인데도 볼거리가 많다.
넘어진 나무가 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기도 하고 잘린 나무 위에 눈이 예쁘게 쌓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눈이 쌓여 보이지 않지만 봄 생각을 하며 걷다 보면 마음속엔 이미 봄이 와 있다. 민들레가 노랗게 피고 연보라색 들꽃이 피어날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산나물이 자라는 곳을 지나면서 어떤 나물이 어디에 많이 자랐는지 생각하면 괜히 좋다.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한겨울이라도 봄 생각을 하면서 눈 쌓인 숲을 걸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아직도 이곳에 봄이 오려면 두 달은 기다려야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면 5월도 금방 온다. 새해가 온다고 했는데 어느새 3월 중순이 되었다. 하루가 길기도 하고 밤이 길기도 하지만 시간은 제 할 일을 한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데 인간의 마음이 안달하며 시간 탓을 한다. 황량한 숲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눈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들만 조금 추우면 추워서 얼어 죽겠다고, 조금 더우면 더워 죽겠다고 엄살을 떤다. 아무리 추운 날도 15분 정도 이렇게 걷다 보면 땀이 난다. 아침에 추워서 옷을 잔뜩 껴입고 나온 날은 15분 뒤부터 더워서 쩔쩔매기 시작하며 다시는 두껍게 입고 나오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추운 날엔 당장 추운 것이 싫어 껴입는다. 잠깐만 참으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한다. 오솔길이 끝나고 큰길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또 다른 오솔길로 연결된다.
다른 곳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간혹 들지만 어디를 가도 거의 비슷하다. 설악산 금강산에 가도 숲을 걷는 것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며 걷는다. 20 대 초반에 친구들과 함께 다닌 명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방값을 절약하기 위해 야간열차를 타고 눈을 붙이고 아침에 도착하여 간단히 요기를 한다.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메고 정상까지 땀을 흘리며 가서 점심을 먹는다. 고추장에 감자와 양파를 넣어 끓여서 밥을 말아먹으면 꿀맛이다. 급하게 하산하여 밤 열차를 타고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학교로, 직장으로 같던 생각이 난다. 엊그제의 일 같은데 반 세기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혈기도 열정도 없어졌어도 이렇게 걸으면 그때로 돌아간 듯하다. 다리에 힘이 줄고 근육도 없어져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해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연말에 왔던 매서운 한파 때문에 걷지 못하다가 연초에 코로나가 방문을 했다. 코로나와 싸우며 잘 낫지 않아 격리기간이 연장되어 한 달여를 집에 있다 보니 다리 힘이 빠져 후들거리고 비틀거려 힘들었다. 그 뒤로 이대로 가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열심히 걷는다. 또 하나의 오솔길이 끝나고 큰 산책로로 나오니 눈부신 햇살이 반겨준다. 층계를 오르고 다리를 지나 다리 아래를 보니 계곡물이 녹아 파란 하늘을 안고 있다. 꽁꽁 얼은 계곡이 있고 녹은 계곡이 있는 것을 보니 어디선가부터 봄이 오고 있음이 확실하다.
봄이 온다고 달라지는 게 없어도 기다려진다. 아직도 불길을 잡지 못하는 고국산에 봄비라도 시원하게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걸어본다. 삶은 이렇게 기다리며 희망하며 사는 것이다. 대선은 끝나고 승패는 났으니 국민 모두가 화합하여 모두가 잘 사는 고국이길 바라고 전쟁도 전염병도 없는 봄을 기다리며 하얀 들판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