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떠난 뜰은 가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른 나뭇잎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싹이 나지 않은 나무는 나목으로 뜰을 지킨다. 봄이 왔다고 하는데 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녹지 않은 얼음들이 크고 작은 섬처럼 놓여있고 햇볕이 앉아 놀고 간 양지쪽에는 파란 잔디가 기지개를 켠다. 땅속으로부터 오는 봄을 만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이 지나고 대지위에는 가물가물하는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작년 가을에 떠났던 기러기가 더 많아진 가족을 데리고 날아온다. 구름이 좋아라 춤을 추는 하늘은 파랗고 주인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는 신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보이지 않아도 이미 와 있는 봄을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
볕이 좋고 바람이 좋아 자꾸만 나가자고 조르는 손주들과 동네 한 바퀴 돌아본다. 봄이 오는 소리에 나왔는데 바람은 차서 겨울 코트를 입고 털모자를 썼는데도 바람이 너무나 차서 손이 시리다. 골목길에 쌓여있던 눈이 녹아서 하수도 구멍으로 흘러 내려가는 소리가 힘차다. 춥고 덥고를 반복하다 보면 자연히 봄은 오겠지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빅토리아에 사는 딸이 꽃이 만발한 나무 사진을 보내왔는데 어찌나 고운지 사진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1시간 반 정도 비행기를 타고 가면 꽃피는 봄을 만날 수 있는데 눈 쌓인 들판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겨울이 원망스럽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동네는 여전히 썰렁하다. 봄이 오면 사람들이 바쁘게 잔디를 다듬고 민들레를 파며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줄텐데 눈 속에서 잠자는 봄을 아무도 깨우지 않는다. 서두른다고 봄이 오는 게 아니고 계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일이 기다림의 연속이다. 태어나면 잘 자라기를 기다리고 자라면 좋은 짝을 만나 아이를 낳고 잘 살기를 바란다. 반복되는 기다림으로 지치기도 하지만 기다림은 또 하나의 희망이다. 기다릴 것이 없고 그리워할 것이 없다면 실로 무미한 인생일 것이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고 겨울에는 또 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림의 연속이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면 햇빛 맑은 좋은 날을 기다린다.
구름이 하늘을 가려 세상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심하게 분다. 세상이 뒤집힐 듯 불어대더니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눈발이 날린다. 겨울이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하기에 미련이 많은가 보다. 바람을 불러오고 눈을 뿌리며 심술을 부리지만 얼은 땅을 녹이는 봄을 이길 수가 없다. 땅을 뚫고 존재를 알리는 생명을 물리칠 수 없다. 자연은 봄을 데려다 놓고 사람들은 환희하며 꽃과 물을 찾아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삶을 즐긴다. 투박하고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들로 산으로 사랑을 찾아 떠난다.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봄을 맞는다. 양지쪽에는 어느새 새파란 원추리가 고개를 내밀고 부추가 세상을 구경하겠다고 나온다.
봄이 되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은 새로운 모습을 하고 살려고 최선을 다한다. 지난가을 어딘가를 가다 말고 쉬던 낡은 낙엽들이 기진맥진한 채 누워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쓰러진 모습이 처량하다. 자연은 그렇게 돌고 돈다. 어제의 모습은 간데없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살다가 때가 되면 미련이나 후회 없이 떠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욕심과 기대 때문에 걱정과 근심 속에 뒤돌아보며 살다가 가는 인간과는 다르다. 추우나 더우나 지으신 이를 찬양하며 뜻을 받들고 살아가는 자연은 참으로 신비롭다. 인간은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남의 것을 탐하며 만족을 모르고 산다. 때가 되면 왔다가 알아서 가는 계절을 닮고 싶다.
구름 속에 숨어있던 햇살이 다시 얼굴을 내밀며 세상을 밝게 비춘다. 바람은 차지만 햇살이 있어서 마음은 훈훈하다. 고국에 봄소식이 부럽지만 이곳의 봄도 너무 늦게 오지 않기를 바란다. 봄이 늦으면 겨울도 늦게 오면 좋은데 알 수 없는 날씨다. 지난가을에 깨끗이 청소하고 맞은 겨울인데 어디서 많은 낙엽들이 날아와서 눈 아래 누워 겨울을 냈는지 놀랐다. 하얀 눈이 뜰을 덮어 보이지 않던 가을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봄이 오지 않는다고 투정하다 보니 청소할 일이 까마득하다. 눈이 다 녹으면 뒹구는 낙엽을 치우고 잔디를 긁어주어야 한다. 겨울이 떠나간 뒤에 봄을 맞기 위한 청소는 끝이 없지만 그래도 봄이 기다려진다.
석양은 산을 넘어가고 하루는 서서히 막을 내린다. 하루가 가고 또 다른 날이 오는 만큼 봄에 가까워지리라. 며칠 동안 눈이 온다 는 일기예보를 들어도 봄이 오고 있기에 걱정이 없다. 겨울이 가지 않고 틈틈이 겁을 주어도 따스한 봄을 이길 수 없다. 가을의 모습으로 돌아온 봄이지만 머지않아 새록새록 피어나는 멋진 초록의 세상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