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다시 하얗게 되었다. 밤새 몰래 다녀간 눈이 세상을 덮었다. 겨울은 미련이 많고 심술궂고 고집이 세다. 그냥 가면 되는데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지 발길을 멈추고 자꾸만 뒤돌아본다. 떠날 듯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꼭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야 떠난다는 인간을 닮았나 보다.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은지 자꾸만 돌아와서 자리를 지키는 겨울이 이제는 원망스럽지 않고 안타깝다. 할 일이 남아 있기에 저렇게 떠나지 못하겠지 하며 보듬어 본다. 시간이 가면 오려는 봄을 막을 수 없고 가려는 겨울을 잡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가지 말라고 해도 가고 오지 말라고 해도 오는 것이 계절인데 괜히 나만 안달한다.
하얀 눈이 쌓인 뜰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본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다. 겨울이 가지 않고 같이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주면 받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한다. 싸우고 경쟁하며 뺏어 올 수 없는 게 삶이다. 달라고 하면 줘야 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 한다. 선택권이 많은 세상이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이렇게 봄에 눈이 오거나 여름에 우박이 쏟아지면 하늘을 바라볼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오면 오나보다 가면 가나보다 하다가 이변이 생겨도 할 수 없다.
산불이 나고 꺼지지 않은 채 계속 타서 해마다 많은 피해를 입는다. 불을 끄려는 소방대원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어도 속에서 타고 있는 불길을 찾아내어 끄기란 힘들다. 인간의 마음대로 필요할 때 눈과 비를 오게 할 수도 없고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자연이 하는 일을 인간이 감히 알 수 없다. 살면서 누구나 실패를 거듭하며 얻은 성공이 영광스럽고 보람 있듯이 봄이 오는 길이 순탄하지 않기에 봄은 더 아름답다.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더 많이 내린 눈을 보며 세상이 더 깨끗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아무도 걷지 않아 깨끗한 눈이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을 만난 것 같이 내 마음도 맑아진다.
세상의 먼지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세상을 씻어주고 눈으로 깨끗하게 덮어 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에 고개 숙인다. 세상을 더럽히는 인간이 없어지면 지구는 깨끗해지고 개미가 없어지면 지구는 무너진다는 말을 들었다. 인간보다 개미가 더 중요한 임무가 있음에 다시 놀란다. 인간의 욕심으로 지구가 오염되고 개미는 지구를 위해 살아간다는 말이다. 지나가다 개미가 보여도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데 개미가 그렇게 중요한 줄 알았으니 앞으로 밟고 죽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자연은 끝없이 희생하고 헌신한다.
땅속과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은 연결고리를 만들고 서로 협조하고 공생한다. 개미 한 마리, 벌 한 마리가 작고 미세하지만 그들은 지구를 살리는 존재로 살아간다. 우리에게 겨울이 없고 여름만 있다면 세상은 너무 뜨거워 타 버릴 것이다. 겨울이 길다고 짜증 낼 것이 아니고 겨울이 있어 감사해야 한다. 겨울이 있어 봄이 있고 그 봄을 기다리며 희망하기에 봄을 맞으며 기쁨도 함께 얻는다. 세상에는 힘들이지 않고 이룬 공적은 아무것도 없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처럼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며 산다. 세상살이는 좋고 나쁜 점이 병행한다. 완벽하게 좋은 것이 없고 철저하게 나쁜 것도 없다.
인생살이 새옹지마고 호사다마에 결자해지다. 좋은 일만 있지 않고 나쁜 일만 생기지 않는다.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다시 험한 길을 걷다 보면 평지를 만난다. 살만하면 걱정거리가 생기고 고통 속에 삶을 체념하고 싶을 때 희망이 보인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의 젊음이 가면서 관심도 의욕도 데려가서 세월 따라 마음은 가벼워지고 욕심은 작아진다. 갖고자 하는 것보다 버려야 하는 것이 많아진다. 차곡차곡 쌓아 모았던 물건들을 보내야 하고 기억도 추억도 희미해져 간다. 영원할 것 같은 삶이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철들어 간다. 모을 것도 없고 쌓아놓을 필요도 없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내 것을 만들려고 욕심내지 말고 오는 대로 맞고 보내며 살아야 한다. 어차피 내 것이면 머물 것이고 내 것이 아니면 떠날 것이다. 겨울도 가기 싫다고 머물고 봄은 오지 않겠다고 게으름을 피운다. 강제로 계절을 오고 가게 할 수 없는 이상 그냥 두고 보면 된다. 아이가 어릴 적 급하게 어디라도 가게 되면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며 울면 가던 길 멈추고 앉아서 우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던 생각이 난다. 장난감을 가져다주고 책을 읽어주면 금방 잊고 웃으며 놀 때 살짝 뒷문으로 나가던 날이 생각이 난다.
그렇게 떨어지기 싫어하던 아이들은 부모가 되었고 젊음과 열정을 가지고 사는 것을 본다. 가라고 하지 않아도 겨울은 가고 오지 않을 것 같은 봄도 온다. 어쩌면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미 봄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않으려는 겨울을 다독이며 어루만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