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눈이 오기 전에 산책을 다녀오려고 했는데 눈이 오기 시작한다. 눈의 모습을 한 비 같은 눈이다. 눈은 눈인데 땅에 떨어지면 바로 녹아 버린다. 며칠 전부터 가고 싶던 강가로 간다. 강물이 반쯤 녹아 한쪽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고 한쪽은 강물이 세차게 흐른다. 눈이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아도 강가를 걷는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강물이 꽁꽁 얼어 있어서 강기슭을 걸었는데 지금은 오리가 해엄을 친다. 얼음이 녹아 유속이 너무 빨라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지럽다. 눈이 모자 위에 앉고 어깨 위에 앉아서 가고 싶지 않다고 속삭인다. 다음에 올 때까지 잘 있으라고 등을 도닥거린다.
이제는 봄이 빨리 쫓아와서 더 이상 머물 수가 없다며 안아달라고 가슴으로 파고든다. 모자에 하얗게 앉아 같이 가자고 한다. "가자. 가자. 같이 가자. 가는데 까지 같이 가보자." 하며 데리고 함께 걸어본다. 눈 내리는 세상은 안개 낀 것처럼 희미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강가를 걷는 내 마음은 행복하다. 봄이 와서 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눈꽃이 핀다. 진달래 개나리는 나중에 피면 보고 지금은 눈꽃도 괜찮다. 겨울이 발목을 잡고 봄을 보내주지 않는데 어쩌랴. 저 멀리 다리 아래 녹지 않은 얼음 위에 오리들이 보인다. 따뜻한 봄이 온 줄 알고 남쪽에서 날아온 오리들이 추워서 벌벌 떨고 있다. "오리야. 며칠만 기다려. 이곳에도 곧 따뜻한 봄이 올 거야." 들리지 않지만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해 본다.
봄이 오는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 기다리는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하늘은 눈만 내린다. 체념과 망각은 최고의 명약이다. 겨울이 더 있어도 좋고 봄이 빨리 오지 않아도 좋다. 기다린다고 달라지는 게 없기에 그냥 바라본다. 작년 여름에 폭염에 시달리며 비 한 방울 오기를 기다린 것을 생각하면 눈 오는 것도 고맙다. 앞이 보이지 않게 오는 눈이 모자 위에 앉아서 하얗게 웃는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숲은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람쥐도 없다. 남편과 나의 발자국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깬다. 눈이 있는 자리에 푸른 잔디가 보이고 죽은듯한 나무가 파랗게 새잎을 달고 서있을 생각을 하며 걷는다.
몇 번을 왔다 간 곳인데 여전히 새롭다. 올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환영하는 숲이 있어 행복하다. 뽀얀 색의 백양나무가 빨간 속살을 내놓고 눈을 맞고 있다. 못 본 사이에 여러 나무가 쓰러져 있다.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봄을 맞지 못한 채 누워 버렸다. 사람이나 나무나 세상에 나오는 것도, 생을 끝내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때가 되면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눈은 누워 있는 나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있는 나무 옆구리에서 쉬기도 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숲을 지키는 자연이 있어 고맙다. 황량했던 땅에 봄이 시작되면 세상은 갑자기 열린다. 질세라 땅을 뚫고 나오는 풀들이 숲을 덮으면 잠자던 생물들이 세상을 구경하러 나온다. 모기, 개미, 거미를 비롯하여 이름을 알 수 없는 만물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자연은 너무나 아름답다. 저 할 일을 하며 먹고살다가 조용히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이런 날 남편과 나는 낭만의 데이트를 한다. 7학년 학생이 나이도 잊고 깔깔대며 숲 속을 누빈다. 더 늦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 가을을 사는 우리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다리를 건너며 강을 내려다본다. 커다란 나무가 강기슭에 누워있다. 어딘가에서부터 흘러와 저기에 누워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한국에서 이곳까지 온 것처럼 멀리서 온 나무가 힘들어서 쉬고 있나 보다. 여름에 강물이 넘쳐흐를 때 같이 내려왔을 그 나무를 바라본다. 끝없이 펼쳐진 강과 하늘이 만나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리 한쌍이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편하게 간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런 걱정 없이 간다. 좋은 곳으로 가리라 믿고 있는 듯 아주 평화롭다. 매 순간 근심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는 달라 보인다. 전쟁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물이 보인다.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 일지 끝이 없다. 그들이 하루빨리 잃었던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다리가 조금씩 아프다고 하는데 갈길은 멀다. 그래도 가다 보면 목적지에 가까워질 것이다. 떠나지 않으면 모르는 길을 가다 보면 가지 않은 것보다 낫다. 오늘 눈이 오고 날씨가 궂다고 집에 있었으면 오늘의 행복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누워서 편하게 텔레비전으로 세상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남편과 눈을 맞으며 산책하며 눈이 오는 날의 낭만을 찾아본다.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다. 멀리 가지 않아도 보이는 행복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