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으면 꽃도 피지 않는다

by Chong Sook Lee


진눈깨비가 온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창밖을 내다본다. 4월 중순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때가 어느 때인데 눈이 온단 말인가? 내가 사는 곳은 눈이 오고 영하 20도의 온도라는데 이곳 빅토리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같은 카나다 하늘아래라 피할 수 없나 보다. 어제 보았던 예쁜 꽃들은 어쩌라고 눈이 오는지 모르겠다. 딸이 만들어준 아침을 맛있게 먹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파란 잔디에 하얗게 눈이 쌓여 오늘은 드라마나 보려고 하는데 눈 섞인 비가 그친다. 구름이 하늘을 가려서 어둡지만 바람이 불어서 눈 온 것 같지 않은 마른 거리에서 바람을 안고 걸어본다. 4월에 비와 눈이라는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받은 잔디는 푸르름을 더하여 바람에 따라 춤을 춘다.


(사진:이종숙)


어둡던 하늘은 서서히 열려 태양이 얼굴을 내 보이며 세상은 다시 밝아진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가고 스쳐가는 것이고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순간순간 어딘가를 향해 가고 무언가가 되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이내 없어져 버린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쳐 지나간 것들은 다시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게 삶이다. 아름다움도 추함도 한번 왔다가 사라져 버리고 또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 하늘은 높고 파랗고 바람은 여전히 불지만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사람이 지나가고 차가 지나간다. 누군가의 힘에 의해 세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돌고 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쇼핑센터가 보인다.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은 쇼핑센터로 가서 할 일을 한다. 물건을 사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한다. 상점마다 물건을 잔뜩 진열해 놓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며 유혹한다. 이제 막 봄이 온 줄 알았는데 여름 상품이 많다. 계절을 앞서간다. 아직은 바람도 차고 겨울이 떠나지 않고 심술을 부리는데 여름옷들을 보니 괜히 기분이 춥다. 이름이 낯익은 상점으로 들어가 구경해 본다. 점원 하나가 반갑게 쫓아와서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며 무척 좋아한다.


철이 지나서 뒤로 밀려나 걸려있는 도톰한 남방이 마음에 들어 가격을 보니 반값 세일을 해서 입어 보았지만 맞지 않아 그냥 나와서 다시 걸어본다. 수많은 물건을 진열해 놓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물건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냥 오고 간다. 세상은 알게 모르게 많이 변하여 물건을 쇼핑센터에서 별로 사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구입하고 카드로 값을 지불하고 사고 판다. 코로나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사람과 가까이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걸어 다니다 보니 배가 고픈데 바로 앞에 일본 식당이 보인다. 요즘에는 식당에서 앉아서 먹는 사람보다 음식을 사 가지고 가는 사람이 더 많다. 줄을 서서 주문을 하고 구석에 있는 의자에 가서 기다리다가 앉아서 먹고 나왔다. 가격은 비싸고 별로 맛이 없지만 대충 한 끼를 때우고 집으로 걸어간다. 길은 차들이 바쁘게 오고 가고 사람들은 몇 명 보이지 않는다.


가는 길에 동네길을 걸어본다. 오다가다 보니 길에 새집 같은 작은 책장이 여기저기 있다. 책을 가져다 놓으면 필요한 사람들이 책을 가져가 읽고 나서 가져다 놓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음식을 가져다 놓는 곳도 있다. 지나가다 배가 고픈 사람들이 가져가기도 하고 집에 있는 음식을 가져다 놓기도 한다. 그냥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나누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냥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가 사용하며 모든 물건을 그렇게 나누다 보면 지구상에 쓰레기도 많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내린 진눈깨비로 계곡에 물이 많아졌다. 계곡을 따라 걸어본다. 아주 작은 꽃들이 들판에 곱게 피어있고 목련과 벚꽃은 힘없이 떨어져 땅에 뒹군다. 며칠 피고 질 줄 알면서도 겨울을 견뎌내고 핀 꽃들인데 벌써 지는 모습이 너무 허무하다. 먼저 피고 먼저 지고, 나중에 폈다가 나중에 지는 꽃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질서를 지킨다. 꽃이 필 때에 비가 오는 것인지 비가 오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인지 모르지만 예쁠만하면 비가 와서 다 떨어진다. 그런 것 보면 살만하면 아프거나 늙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세월이 가면 무언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특별히 해 놓은 것도 없이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간다. 아이들은 일하기 싫다며 엄마 아빠처럼 퇴직하고 싶다고 한다. 열심히 일을 하며 살던 나도 한 때 먼저 퇴직한 선배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퇴직을 하고 자유롭게 오고 가며 살고 싶었다. 나이가 되어 퇴직을 하고 보니 더 일찍 퇴직하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로 좋았는데 어느 날 나이가 들어간 것도 알게 되었다. 퇴직한 우리를 부러워하는 아이들의 나이가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사는지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때의 내가 생각이 난다.

꽃이 피면 비가 오는 게 아니고 꽃과 비가 함께 만나며 꽃이 피듯이 젊음과 열정이 합쳐져 인생이 된다. 늙고 싶지 않아도 늙고,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꽃이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피고 진다. 바람이 없고 비가 오지 않으면 꽃도 피지 않는 것을 새삼 알아가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딸네 집으로 간다. 딸네 집에 온 지 3일이 간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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