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9.
백두대간 청화산 남쪽 원적사 아래 우복동길 옆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았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여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실은 이 곳이 우복동인지 나도 몰랐었다. 여기 와서 토지 매입 계약을 하고 검색을 하면서 이 곳이 우복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20년 5월 초 친구들과 모임을 했다. 이 곳과 같은 지역인 농암면 내서리 다락골에 있는 다락 산장에서 하루 묵으면서 산장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가운데 나중에 시골에 내려와 살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좋은 땅이 있다면서 한번 가보자고 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가랑비와 운무 속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농암면의 여러 토지를 구경했다. 산장 주인의 땅이고 매물로 내어 놓은 땅이다. 처음 가본 그곳이 바로 우복동길에 있는 이 곳이다.
청화산(靑華山, 984m)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산으로 남쪽으로는 속리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조항산을 거쳐 조령산을 지나면 문경새재가 있다.
조선 영조 때의 시인이자 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화산을 언급했고, 스스로 청화산인이란 호를 사용했다.
"청화산은 내선유동과 외선유동을 등지고, 용유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계곡물과 바위가 실로 기이한 형상이라 속리산보다 낫다. 높고 큰 점에서는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속리산처럼 지극히 험한 곳이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와 띠처럼 두른 바위가 모두 밝고 빼어나며 살기가 거의 없다. 모양은 단정하고 평탄하며 수려한 기운이 솟구쳐서 가려지지 않으니 복지(福地)라 해야 할 것이다."
- 이중환, 완역 정본 택리지, 안대회 등 옮김.
원적사(圓寂寺)는 신라 무열왕 7년(660)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효 스님의 모습으로는 최고(最古)라는 ‘해동초조원효조사진영’이 있다. 들리는 말로는 200∼300여 년 전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원적사는 고종 40년(1903) 석교 대사(石橋大師)가 중창을 한 이래 1987년 서암 큰스님께서 거대한 암석으로 이중 축대를 쌓고 땅을 돋아 법당과 선원, 요사채를 신축하고 길을 정비한 것이다.
우복동(牛腹洞)은 십승지의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중기에 정착된 개념인 승지(勝地)는 난리가 났을 때 목숨을 보전하고, 양식 걱정이 없는 뛰어난 땅으로 무릉도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설적 이상향이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예전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한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이 없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백 년 가도 늙지 않는 장수의 고장이라네."
- 정약용의 ‘우복동가’ 일부(우복동가는 우복동을 찾는 선비들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시임)
약간의 농사, 그리고 저술 및 사진 작업을 병행하는 삶을 구상한다. 아직은 밭에 불과하지만 농작물(오미자, 아로니아 등)을 심을 생각이다. 우선은 농막을 짓고 주말에 잠시 이용하고, 나중에 아담한 집을 지을 생각이다.
터를 잡고 보니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갑자기 많아졌다. 문경의 특색과 특산물을 중심으로 전공인 마케팅을 접목하여 농촌과 농업, 귀촌과 귀농, 특산물(오미자)과 마케팅을 결합한 로컬 비즈니스를 하면 어떨까 고민된다. 그리고 백두대간과 사진을 결합한 포토에세이 단행본과 아울러 이 곳에서 백두대간 사진전시회도 구상하고 있다.
인생 2막의 첫발을 떼며, 이름 없는 이곳에 청화산(靑華山)의 정기를 받아 삶을 일으키는 공부를 하는 서재(書齋)의 의미로 "청화 서재(靑華書齋)"라고 명명한다. 청화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작품을 만들고, 농사를 짓는 '반농 반작(半農半作)'의 삶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