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연애, 여행, 문화생활 즐기기 등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취업을 하고서는 착실하게 준비해서 결혼도 빨리 하고 싶었다. 20대 후반에는 이 모든 게 현실로 되어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해야지! 라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때쯤 확실하게 되었다. 내 미래만을 생각하며 준비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어디든 간에 무조건 국립대학교를 가야겠어
고등학생 시절 가장 큰 목표였다. 왜냐? 등록금이 싸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도 있고 대학교를 가지 않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것도 있는데 저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국립 대학교를 졸업해서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하거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루트라고 생각했다.
왜냐? 환경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나름의 노력으로 모 국립대 경제학과로 진학에는 성공했고 1학년을 마친 후 입대를 했다. 전역하기 몇 달 전 우연히 알게 된 어려운 자격증 시험을 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복학 후 2년을 다니고는 휴학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약 3년의 시간을 투자하며 많은 것을 잃고 남기게 됐다. 남는 게 자격증이면 그나마 좋았을 텐데 아니었다. 망가진 신체와 정신, 자책 등이 내게 남은 거였다. 더군다나 그 시간 동안 20대 후반이 되었고 내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격차가 생겼다. 사회적인 위치와 돈도 있지만 가장 큰 격차는 대화의 수준이다.
"취업 준비하는데 A 쪽이 잘 안 나와서 답답하다"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는 나와
"어디에 얼마 정도 넣었는데 얼마를 벌었다", "어디 적금 넣으면 얼마 정도 얻을 수 있다던데?" 등
이런 내용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
내가 사는 현실과 친구들이 사는 현실은 달랐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나는 아팠다.
거기에다가 예전부터 안 좋았던 환경은 여전히... 아니 더 안 좋아졌기 때문에 알아서 부담감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던 나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행복, 즐거움 등 웃게 만드는 무언가는 당연하게도 나와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명은 누구나 웃어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연을 내게 보냈다.
우울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 우연히 듣게 된 노래에 완전 감동받아 소리 죽여 펑펑 울었더니 그 가수의 다른 노래도 듣고 싶어졌다. 다행히 그 가수는 우리나라 가요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랑과 이별의 감정만 노래하지 않고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노래라는 도구로 표현한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없노라고 그대여
신해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라. 그래도 된다.'라고 말해주는 거 같았다. 그렇게 내게 '괜찮아'라는 말을 노래로 건네줬다. 아니 당시 너무 힘들었던 내가 알아서 '괜찮아'라는 말을 만들어 들었다. 어떤 말을 만들어내서 듣는 건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 전의 내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