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애써 내 환경을 무시하고 싶어서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생각하며 나를 게임 속 아바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온전히 현실을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들어서 정신적인 도피를 한 것이다. 그곳에서는 웃을 일이 많고 무표정은 잠시 얼굴 근육을 풀기 위한 도구로서만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사는 건 한계가 있다. 현실만큼 리얼한 건 없기 때문이다.
아바타가 아닌 현실 세계의 나는 웃고 있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집에서 웃고 있지 않다. 유튜브 속 화면은 과거에 내가 너무 좋아했던 예능, 내가 너무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로 이뤄져 있어서 순간은 웃을 수 있었지만 내 얼굴에 남아있는 표정은 무표정 (혹은 인상 짓는 표정)이다.
지금 밥을 먹고 있는 게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일.
지금 샤워를 하고 있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손가락질을 받기 싫은 일.
하나하나 의미를 두며 살 필요는 없지만 수단으로써 모든 걸 대하고 있는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내 얼굴에 그 무게가 자연스레 드러나게 됐다.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아무래도 부모님과 같이 살다 보니까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그냥 이래저래 생각이 많네요. 돈을 더 벌어야 해결되잖아요. 그런데 어떤 성과도 없고 그렇네요 참."
"미안하다. 괜찮아질 거야. ~"
괜찮아.
이 말은 위로를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 말은 위로의 의미였다.
그런데 왜 내 가슴에는 분노가 생겼을까?
진심을 담은 위로라는 게 느껴지는데 왜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답은 의외로 쉬웠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말의 특징 중 하나기 때문이다.
"네."
난 위로의 말인 괜찮아를 외면하며 대답했다. 원망하지 않기 위해.
그 여파로 내가 힘들게 됐지만 이런 환경을 만들려고 한 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알기 때문에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꺼내며 느꼈을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원인 제공을 한 사람들에게 듣는 위로의 말은 기만이다.
하지만 그 말 밖에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걸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가 없다.
원망하기에는 미안하고 이해하기에는 원망스럽고.
누구에게 듣는지가 말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구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 의미를 정의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게 위로의 말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