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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망고 Oct 26. 2022

칼잡이? 실잡이!

외과의사는 칼잡이가 아니다.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의학드라마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스치듯이 예고편의 한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주인공인 김사부(배우 한석규)가 장엄한 음악을 배경 삼아 비장한 표정으로 ‘칼잡이니까요’라는 말을 하는 부분이었다. ‘칼잡이니까요’, ‘칼잡이예요’, ‘칼잡이죠’ 어미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의학드라마 수준 참….’라고 궁시렁거리면서 의학드라마는 사실적이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편견을 한번 쓰다듬으며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마음에 거리끼는 부분은 ‘칼잡이’라는 단어에 있었다. 


수술칼, 즉 매스하면 생각나는 만화가 있다. 의학드라마 ‘하얀 거탑’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천재 흉부외과 의사의 이야기인 ‘의룡’. 여기에 보면 흉부외과의 원로 교수님이 수술의 가장 첫 부분에 매스를 들고 환자의 가슴 정중앙을 꾸욱 눌러서 베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장면 뒤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훌륭한 인시젼’이었다면서 박수를 치고 원로 교수님은 의기양양하게 매스를 떨어뜨리듯 선반에 올려두고 장갑을 벗는다. 매스, 수술칼은 외과를 상징하는 물체임에는 틀림없다.


수년 전 의사 자격증을 딴 뒤에 부모님과 ‘어떤 과’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의사는 칼을 잡아야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칼 잡는 것은 절대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내 삶이 달라져 있을까? 싶기는 하다. 아무튼 인턴이 지난 뒤 외과 의사가 되었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났지만 칼 또는 매스를 잡은 적은 별로 없다. 손에 주로 걸쳐져 있는 것은 축 늘어진 까만 실크 실 또는 파란색의 나일론 실, 아니면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늘어서 실눈을 게슴츠레 뜨고 봐야 겨우 보이는 날아갈 것만 같은 투명한 실이었다. 이 실 때문에 수술방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수술은 간단하게 말하면 묶고 자르는 작업의 반복이다. 대체로 3명이서 수술을 하는데 세컨드 어시스트는 몸 구조물을 당기거나 밀어서 시야를 만들어주는 작업을 한다. 말로는 쉽지만 내가 잘 보이는 대로 당기면 혼난다. 이 일은 주로 인턴이나 저년차 전공의가 한다. 본인이 경험해보지 않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시야가 잘 나오도록 구조물을 정리해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훌륭한 퍼스트 어시스턴트는 자기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세컨드 어시스턴트가 기구를 잡고 있는 모양을 바로 잡아주거나 힘 조절을 해주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 퍼스트가 본업을 못하고 세컨드를 신경 쓰고 있으면 ‘니 일이나 잘해라’라고 한 소리 듣는다.


퍼스트 어시스턴트의 메인 잡은 타이(tie)이다. 안 풀리게 잘 묶는 것이 퍼스트의 사명이다. 주로 묶게 되는 것은 혈관인데 헐겁게 묶으면 피가 난다. 당장 피가 나면 다행이지만 수술이 끝나고 병실에 올라갔는데 피가 나면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또 너무 세게 묶으면 실이 끊어진다. 타이는 양손 또는 한 손으로 성긴 매듭을 지은 다음에 검지를 이용해서 타깃 지점을 향해 밀어 넣은 뒤에 실을 꾸욱 잡아당겨서 조이는 행위이다. 여기서 꾸욱 잡아당기는 과정이 타이가 얼마나 세게 잘 묶였는지를 결정하게 되는데 잘하는 사람은 고무줄처럼 실이 늘어나고 못 하는 사람은 타이가 조여지기도 전에 끊어진다. 중지 약지 새끼에 실을 감아쥐고 사명감을 다해 검지로 실을 받쳐서 실을 조이는데 '뚝'하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와 함께 수술방 분위기가 서늘해지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이는 집도의와 호흡을 맞춰서 하기 때문이다. 집도의가 집게(켈리 등)으로 구조물을 잡고 있으면 실을 그 집게 끝을 기준으로 돌린 뒤에 매듭을 짓고 그것을 밀어 넣은 뒤에 거의 타깃 지점에 왔을 때에 집게를 푼다. 그다음에 실을 당겨서 조이는데 만약에 그 상황이 시야를 힘들게 확보해서 겨우겨우 구조물을 집게에 걸었다거나 염증으로 인해 조직이 잘 잡히지 않는 상황인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잡아서 타이를 할 기회가 딱 한 번만 있다던가 하면 실을 당기는 그 시간이 천년만년 같다. 그게 끊어진다면… 머라 비유할 수 없는 감정이 온 수술방을 감싼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순간은 실 때문에 구조물이 끊겨버리는 순간이다. 집게 끝을 기준으로 실을 돌린다고 했는데 이게 너무 느슨하게 실을 잡고 돌리면 제대로 걸리지가 않아서 어느 정도 실을 팽팽하게 돌리고 그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렇다고 실이 너무 팽팽해지면 집게를 집어 당기면서 구조물을 끊어먹을 수가 있다. 그런데 그 구조물이 중요한 것이고 그렇게 힘들게 잡았던 상황이면 구조물이 끊어짐과 함께 교수님의 정신줄이 끊어진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몸으로 교수님의 분노를 받아내야 하는데 사실 자책감이 더 커서 교수님의 화가 작게 느껴질 지경이다.


회진 때 판을 들고 있고 거기에 까만색 실이 잔뜩 걸려 있다면 그 사람이 전공의일 가능성이 높다. 검지에 살이 깊게 파여 있다면 이제 수술방에서 열심히 타이를 시작한 전공의일 가능성이 높다. 검지로 실을 받쳐서 당기다가 그 실이 손톱과 살 사이에 파고들면 참 아프다. 아무튼 이런 아픈 과정을 거쳐서 외과 전공의는 성장한다. 처음에는 시장에 할머니 보따리 싸듯이 타이하다가 점점 실력이 늘기는 하는데 이제 좀 한다 싶으면 더 고수가 보인다. 그들의 부드러운 손놀림. 하지만 부드러운 움직임 끝에 남는 단단하고 깔끔한 매듭을 보면 내가 한 타이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내 타이가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날카로운 매스보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실에 얽힌 추억과 쓰라린 기억들이 많은데 타이를 조명해주는 의학드라마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런데 그 말은 수술의 조연인 전공의가 드라마의 중심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쓸까 싶기도 하다. 타이 안 한지 2년이 지나서 검지의 굳은 살도 다 빠졌는데 갑자기 쓰라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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