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언론에 공개하는 일이 있었다.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대통령이 출생증명서를 공개하게 된 것은 미국 정치 역사에서 너무나 수준 낮고 천박한 사건”이라고 비난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백인이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 오바마 대통령이 공개한 출생증명서
오바마 대통령은 왜 임기가 절반이나 지난 시점인 2011년 4월에 출생증명서를 공개했을까?
오바마 대통령 입장에선 그의 출생지와 관련한 ‘음모론’을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오바마는 하와이가 아닌 케냐에서 태어났다.”
“오바마는 유년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냈고, 당시 미국 국적을 상실했다.”
“출생증명서만 공개하면 되는데 하지 않는 걸 보니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러한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로선 만화적 인물에 가까웠던 도널드 트럼프가 음모론의 선두에 섰다. 트럼프는 2011년 초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본토 태생에 관한) 출생 기록이 없어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거기에는 그가 무슬림이라고 돼 있을지도 모르죠."
며칠 후 <CNN> 인터뷰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출생 관련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200만 달러를 썼다”라는 황당한 주장까지도 했다.
▲ 트럼프의 버서논쟁에 관한 정치전문지 <POLITICO>의 만화 만평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 관련 음모론의 출발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2008년 민주당 경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지지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곳곳에 익명의 e메일을 보내면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2016년 대선 당시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 관련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큰 비판에 직면한 당시 트럼프 후보는"민주당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2008년 민주당 경선 때 먼저 이른바 '버서birther 논쟁’을 시작했다"며 책임을 돌리는 일도 있었다.
대통령의 자격
미국 대선에서 후보자의 출생지가 문제가 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 본토에서 태어난 도널드 트럼프나 마르코 루비오에 대해서도 ‘선천적 시민권자natural born citizens’ 논란이 있었다. 트럼프의 모친이 스코틀랜드 출신이고, 루비오는 부모가 쿠바계 이민자라 엄격하게 보면 태생적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 2010년 당시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에 의문을 제기하는 입간판(South Gate, California)
마찬가지로 공화당의 경선 후보였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도 경선 첫 관문인 아이오와 코커스를 앞두고 캐나다 출생을 거론하며 대통령 피선거권 자격 시비를 제기하고 나선 트럼프의 태클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심지어“캐나다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태생적 시민권자가 될 수 없다”는 취지의 크루즈의 ‘대통령 피선거권 박탈’ 청원이 일리노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제기되기도 했다.
애국심의 상징이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조차도 ‘버서 논쟁’의 화살을 피하지는 못했다. 2008년 대선에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1936년 해군 장교이던 아버지가 주둔하고 있던 파나마 운하 지역의 군 시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서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은 애리조나가 미국의 주에 편입되기 전인 1909년에 태어난 것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을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
미국에선 왜 대통령선거 때마다 후보자의 출생지가 문제가 될까? 바로 헌법 때문이다. 헌법은 대통령의 자격으로 3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35세 이상’이면서, ‘14년 이상 미국에서 거주자’이고, ‘선천적 시민권자’여야 한다. 35세 이상과 14년 이상 미국 거주 요건에 대해서는 대체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선천적 시민권자'가 문제다. 이 문구의 해석을 둘러싸고‘미국 본토 태생으로만 한정되는 것인지’를 놓고 법학계나 정치권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이 문구에 대해서 헌법은 별도의 정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천적 시민권자’를 ‘미국 본토에서 태어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 국적법은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국적을 부여하는 속지주의(출생지 기준)를 원칙으로 하되, 예외적으로 속인주의(부모의 국적을 물려받는 것)를 인정해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11년, 미국 의회에서도 "'선천적 시민권자'라는 문구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 의도, 1790년의 ≪귀화법≫에서 시민권자의 정의에 ‘미국 시민권자로부터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포함’이라는 문구를 명시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반드시 미국 본토에서 출생하는 것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따라서 부모가 외국인이더라도 미국 영토에서 태어났거나, 외국에서 태어났어도 부모가 미국 시민권자이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 헌법에서 ‘선천적 시민권자’라는 문구가 들어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미국은 지금과 같은 강대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을 상대로 기적적으로 독립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유럽 강대국의 침략을 걱정하는 약소국이었다. 미국인들은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같은 강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다시 집어삼킬까 항상 전전긍긍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나온 것이 바로 ‘선천적 시민권자’라는 문구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이나 프랑스인들이 혹시라도 미국인으로 귀화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아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연방헌법 제정에 참여한 존 제이 초대 대법원장이 조지 워싱턴에게 쓴 편지에서 대통령 자격을 ‘선천적 시민권자’로 제한하는 것은 ‘외국인들이 연방정부에 들어오는 것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