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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나눔 Nov 02. 2022

감정의 위치

감정에 충실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내 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이다.

정신 의학적으로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감정을 억제하는 데에 가치를 두어 왔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 감정대로만 살기 힘들다.

누군가 나를 화나게 했다고 멱살을 잡을 수는 없다. 잘못하면 유치장에 들어갈 수 있으니.

분을 품고 며칠을 보내기도 힘들다. 에너지만 소모되니.

그래서 감정에 충실하라는 말은 잘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감정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고 표출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감정은 우리 삶의 질에 직결된다. 아니 삶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 사람의 희노애락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행복을 알 수 있다.

대부분 화을 내고 슬퍼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반면, 매 시간 즐거워하는 사람을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감정은 사실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어떤 일(사실)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어떤 일이 없으면 감정도 없다.

지금과 같은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슬픈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떨어지는 낙엽이라는 사실을 감정이 따라온 것이다.

당연한 이 진리를 때로 우리는 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더 기쁜 소식이 있다. 이것도 우리가 알고 있다.

사실과 감정 중간에 ‘반응’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 반응 -> 감정     


반응은 사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길을 가다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은 경험이 있는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런 경험이 있다.

그때, 화가 나서 돌부리를 걷어찼다. 물론, 내 발만 아프고 쏟은 커피는 더 길바닥에 스며들었다. 

넘어짐(사실)과 화(감정) 중간에 있는 내 해석은 우선 ‘창피하다’였다. 다행히 행인이 많지 않아 초등학생 몇몇과 시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한 분이 보였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 커피잔을 주어 뚜껑을 지그시 닫고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서 눈길을 돌리고 멀어지자 두 번째 해석은 ‘화가 난다’였다. 그래서 원인을 제공한 돌부리를 노려보고 응징을 한 것이다. 

물론, 발이 아파서 더 화가 나게 되었다.

세 번째 해석은 ‘오늘 재수가 없다’였다. 하필 그 돌부리가 그 넓은 길에 내 앞에서 그것도 내 오른발을 정확히 조준하다니. 그것도 커피를 이제 막 마시려는 찰나에. 그러니 오늘 안좋은 일이 더 일어나리라 생각하고 침체된 것이다.

이렇게 사실에 대해 3가지의 해석에 의해 3가지의 감정(창피, 화, 침체)이 생긴 것이다.     

사실 감정은 죄가 없다.

그냥 사실과 해석(반응)을 따라간 것 뿐이다.


사실은 수면 위에 있고 감정은 그 밑에 있다. 

비가 온다는 사실 밑에는 수많은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수많은 반응(해석)이 있다. 

비(사실)를 보고 ‘우울하다’의 반응에서부터 ‘운치가 있다’, ‘가뭄에 단비’라는 반응까지 우리의 해석은 가지가지다.  

그러나, 그 반응(해석)은 조절이 필요하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인 해석을 조절하는 것이다. 

감정에 충실하는 것은 감정에 사로잡히는 위험이 있다. 

어떻게 느끼냐보다 어떻게 인지하느냐가 중요하다.     


감정의 해석(반응)은 원인 분석과 전환이다.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어떤 하나의 사실, 혹은 여러 사실들이 결합되어 분노와 우울 등에 먼저 사로잡힌다. 

그것이 반복되고 고조되면서 어떤 순간 알콜로 인해 반응(해석)이 힘을 잃을 때, 극단적 실행을 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럴 때, 술 등 자극적이고 인위적 억제제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분노와 우울 등의 원인을 알아내고 해석하며 반응을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적인 현상에 저항을 해야 한다. 

사실을 재해석하고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야 한다. 

안좋은 감정은 마냥 충실할 것이 아니라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반응(해석)은 곧 언어이다. 

언어를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언어에는 상대방과 대화, 혼자 중얼거림, 그리고 머릿속 말이 있다. 우리가 생각한다고 했을 때도 무언가 머릿속 말을 한 것이다. 

아주 뜨겁거나 차가운 물에 갑자기 손을 넣을 때 무슨 말이 나오는가?

“앗 뜨거워!” 같은 본능적인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본능이 아니라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만일, 그 물이 차갑다고 생각을 했다면, 실제 물이 뜨거워도 순간적으로 “앗 차가워!”라고 외쳤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반응(해석)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반응(해석)은 결과(감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반응(해석)에서는 대화보다 머릿속 말과 중얼거림의 비중이 크다. 

가면 안의 진짜 얼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 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머릿속 말 > 중얼거림 > 대화     


감정 이전에 반응(해석)은 평소 인식에 기반을 둔다. 

뜨거운 물을 차갑다고 평소에 잘못 생각하고 있듯이 우리의 인식과 가치관이 올바른지 점검하는 것이다. 

그 인식과 가치관은 우리의 언어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지불식간에 내뱃는 언어가 우리를 만든다. 

유튜브나 언론에서 정제된 여과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입력은 우리의 언어를 만든다.

그 정보들을 접하고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접하기 전에 볼 것, 들을 것을 미리 선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감정에 너무 충실하지 말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교정해야 한다.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치 맥박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 

자동적으로 가동되는 현상에 집중할 이유가 없다.

감정이 아닌 생각(해석)에 예민해야 한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감정을 장기간 허용한 결과다.

오늘 아침에 우울한 마음에 충실하는 것이 아니라, “응 날씨 탓인가? Ok, 하지만 할 일은 해야지. 이럴 때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나 해볼까?”라고 전환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감정에 너무 충실하는 것은 집착을 야기하고 자칫 위험할 수 있다. 일, 운동 등 다른 무언가에 충실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감정에 사로잡혀 나태하게 되는 것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나태는 감정을 가속화 한다. 쉼과 나태는 구분해야 한다. 

감정은 또한, 몸 상태에도 많이 좌우된다. 체중조절 등 몸을 최상의 컨티션으로 항상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신에게 집중할 때 일어나기 쉽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나의 가면에 집중하기보다 타인에게 집중을 하자. 

타인에게 필요한 것을 찾자. 그들을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자.

회사같은 단체도 회사의 이익과 조직에 집중하기 보다 고객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조직을 통해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갈등과 침체에 도움이 된다.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고 방문해서 봉사는 회사가 건전하게 성장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남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감정의 위치는 맨 끝이다.

맨 끝부터 출발해서는 않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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