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나
학교 때,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한 친구가 있었다.
짝꿍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방과 후 같이 집에 가면서 재잘거리고 학교에서도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는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면이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것과 말을 어른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무슨 철학자라도 되는 것처럼, 인생에 대한 격언을 하는 듯한 말도 한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그 나이 아이들이 하는 욕이나 상스러운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공부는 아주 잘하지 못했지만, 중상위권은 유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당시에 그냥 좀 독특한 친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오늘 기억이 난다.
얼굴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만 이름은 잊었다.
지금에야 와서 느낀거지만, 그는 성숙한 친구였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치르는 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토론회를 밤늦게 보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복기하면서 생각하는 단어가 ‘성숙’이다.
이런저런 정책을 공약하고 제도를 개선한다는 이야기,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을 남발하지 말라는 공격, 어떻게 하면 그럴싸하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모습들.
정치 제도가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것보다 구성원의 성숙이 더 중요하다.
정치의 수준은 구성원들의 수준이다.
정치 제도가 구성원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정치 제도를 이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은 구성원의 미숙을 반영한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 지도자의 잘못이 아니라 전체 구성원이 그를 낳은 것이다.
정치인, 공무원도 한 사람의 시민이고 구성원이다.
그는 그 구성원을 대표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나섰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경쟁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이면 좋겠다.
그런 사람을 잘 선별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몫이다.
그냥 지역이 어디이니, 당 색깔이 무엇이니, 지인이 아는 사람이니 찍어주는 것은 미성숙한 것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정치인, 공무원들을 더 비판한다.
비록 잘 아는 사람이라도, 연고가 있더라도 객관적으로 그의 공약과 인간 됨됨이를 살펴보아 결정을 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이다.
선진국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있지만, ‘성숙’이 가장 큰 기준이 아닐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성숙은 질서 준수, 정치 참여,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의 조화, 가치 수준, 배움의 열정 등이다.
강대국을 일컫는 기준 중에 하나가 인구 5천만,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이다. 전 세계 7개 국가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경제력만으로는 세계 10위 선진국이다.
대부분의 선진국 분류에서 우리나라는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선진국 시민인가? 아니, 선진 시민인가?
왕권에 대항하는 시민의 궐기, 산업화와 더불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 사이의 갈등, 치열한 민주 투쟁, 시민권과 인권의 보장을 위한 싸움.
지금 성숙하다고 생각되는 나라들이 겪은 긴 성숙의 과정을 우리나라는 너무 빨리 지나왔다.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유일한 나라인 대한민국.
그 과정이 빨랐기에 지금 우리는 다시금 그 과정을 되새김질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갈등’과 ‘앙금’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고 지나왔다.
나의 이익보다 전체 파이를 키우는 성숙한 문화가 좀 더 정착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제도, 정책은 누구나 내세울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잘 구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공산주의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면서 나온 아류이다.
‘주의’는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숙한 사회는 그 ‘주의’에 매몰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주의’를 권력과 탐욕의 수단으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주의’를 개인의 이익의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잘못된 ‘주의’가 될 수 있다.
빛이 창가에 서있는 초록 잎에 부딪히고 다시 반사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섬광.
내가 누군가의 섬광이 되려고 할 때, 그 빛은 어둠을 비춘다.
사회도, 제도도, 그리고 사업도 잘 익은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