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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롱 Jun 24. 2017

엄마, 고향이 뭐예요?

넌 고향이 없는게 아니라 많은거란다.

"엄마, 고양이는 캇제(Katze)지?"

"그럼 고양이는 캇제지."

"이상하다. 그런데 한글학교 선생님이 자꾸 고양이가 캇제가 아니고 하이맡(Heimat)이래."

"엥? 고양이가 하이 맡이라고? 무슨 소리야?"

"아니, 한글학교 선생님이 책 읽어주다가 '어린이 여러분, 고양, 고양 알아요? 독일어로 하이맡,하이맡이 고양이예요.' 이러더라… 고양이는 독일어로 캇제인데…"

"진짜? 푸하하하. 조슈아 고양이가 아니고 고향이야. 햐햐햐햐 향!"


선생님은 분명히 "하이맡이 고'향'이에요." 라고 하셨겠지만 고향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아들은 "고양이예요" 하고 알아들은 모양이다. 세상에… 고향이 고양이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고양이에 대한 의심은 풀렸지만 아들은 질문을 이어 나간다.


"엄마 그런데 하이맡은 뭐고 고향은 뭐야?"

"하이맡 몰라? 태어나서 자란 곳이 하이맡인데…."


하이맡, 즉 고향이라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한국에 살았으면 벌써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고올-하면서 고향의 봄을 배웠을 텐데… 외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 치고는 의사소통에 문제없이 한국어를 꽤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휘력이며 독해력이 이제 한국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 같다.


"그럼 엄마의 고향은 어디야?"

"엄마 고향은 대한민국 청주지. 거기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쭈욱 거기서 살았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지금 청주에 살고 계시잖아."

"그럼 아빠의 고향은 어디야?"

"아빠 고향은 스위스 루체른이지. 아빠도 거기에서 초등학교 김나지움 다니고, 취리히에 있는 대학교에 다닐 때도 2학년 때 까지는 매일 기차 타고 다녔대."

"그럼 내 고향은 어디야?"

"어? 니 고향?... 글쎄, 그러게 니 고향은 어딜까?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남편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진짜 우리 아이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이제 막 만으로 8살이 된 아이는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2년 6개월을 살았다.  동생이 태어난 지 정확히 백일이 되던 날 스위스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자기는 '어뭬리칸'이라고 우기며 2년동안 미국에서 살다 독일로 건너와 3년째 살고 있다. 유럽-아메리카 대륙을 넘나드는 이사를 하며 오고가는 와중에 한국에서 얹혀 지낸 시간이 6개월 정도 된다. 지금은 물어보면 자기는 한국 사람이기도 하고 스위스 사람이기도 하지만 독일에 살고 있다고 대답한다.  한국과 스위스를 자신의 나라라고 말은 하지만,두 고국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과 지식이 있지는 모르겠다.  많이 양보해서 한국과 스위스가 너의 고국이라 친다 하자. 그렇지만 고향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정말 어디가 너의 고향일까?


내 고향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청주시 봉명동이 내 고향이다. 88년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얼마 전 우리 부모님은 봉명동에 집을 마련하셨다. 주황빛에 가까운 빨간 벽돌로 지은 이층 집이었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빠가 나무를 가꾸시던 화단도 있고, 대문과 화단 사이에는 엄마가 쪼그려 앉아 운동화를 빠시던 수돗가가 있다. 수돗가를 마주 보고 있는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가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던지던 현관이 있는 단독주택이다. 처음으로 집 장만을 하신 부모님이  친척들을 불러 크게 집들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난 초등, 아니 국민학교 2학년. 그 집에서 남은 초등학교 4년을 다니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다녔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봉명동 집을 나왔지만 격주나 아무리 길어도 3주에 한 번씩은 꼭 내려와 부모님이 지어주신 맛난 밥을 먹었던 곳이다. 부모님은 그 집에서 나와 동생을 키우시고 출가시키시면서 28년을 그 집에서 사셨다.  


이미 나는 그 집을 나온 지가 벌써 18년이나 되었지만, 작년 여름 막상 부모님마저 그곳을 떠난다 하니 왠지 실향민이 된 기분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봉명동 우리 집 생각을 하다 보니 별의별 기억이 다 떠올랐다. 초등학교 다닐 적 땡칠이라는 강아지를 키웠는데 가끔 학교 끝나고 집에 와 보면 그 개가 목줄을 풀고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땡칠이가 대문 너머로 날 보고 반갑다고 뛰어오는데, 나는 세상에서 그게 제일 무서웠다. 마침 엄마가 집에 계시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땡칠이를 좋아하는 동생이 올 때까지 대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동생이 와서 땡칠이를 꼭 붙잡고 있을 때 얼른 뛰어 들어가려다 현관 앞 계단에서 넘어서 무릎이 까진 적 있다. 그때 난 상처가 아직도 흐릿하게 남아있다.


아빠는 화단에 이런저런 나무를 가꾸셨는데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는 앵두나무였다. 앵두가 맺히고 자라 빨갛게 영글어 가는 걸 보면서 앵두 따 먹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드디어 앵두가 마침하게 익어 오늘이면 따 먹을 수 있겠구나, 학교 다녀와서 따 먹어야지, 하던 날.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집에 돌아왔는데 웬일인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할 빨간 앵두가 한 알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날 저녁 윗집에 사는 자매가 하늘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앵두를 가득 담아 들고 내려왔다.  나와 동갑이었던 초등학생 자매에게도 앵두가 참 맛나 보였었는지, 나보다 학교에서 일찍 도착한 자매가 앵두를 다 따버렸던 것이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결국에는 다 같이 나눠먹었던 것 같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한 두 해 후 아빠는 앵두나무를 없애 버리셨다. 그런데 초등학교 친구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 앵두나무 이야기를 한다.


파고 파도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샘이 마르지 않는 청주시 봉명동 우리 집이야 말로 나에게는 진짜 고향이다.   내 성장의, 그래서 내 추억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봉명동 빨간 벽돌집은 내게 그저 거주하는 곳으로써의 집 이상의 의미가 있는 소중한 곳이다. 사람은 어린 시절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어쩌면 진하고 끈끈한 고향의 자양분 덕분에 내가 지금 머나먼 독일에서 타향 생활을 잘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자기는 고향은 어디인지, 자기는 고향이 없는 건지 재차 묻는 아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음, 넌 고향이 없는 게 아니라 고향이 많은 거지."


대충 둘러대려다 얼떨결에 나온 대답이었는데, 내가 들어도 꽤 그럴싸한 것 같아 말을 더 이어 나갔다.


"네가 아기에서 어린이로, 그리고 어른이 될 때까지 엄마 아빠랑 같이 행복하게 지내는 모든 곳이 다 조슈아 고향이야. 엄마는 태어나서 어른될 때까지 계속 청주에서만 살았잖아. 그래서 청주만 엄마 고향이야. 그런데 너는 엄마 아빠랑 같이 스위스에서도 살고, 미국에서도 살고, 또 지금은 독일에서도 살잖아. 그러니까 넌 고향이 벌써 세 군데나 되는 거지."

"그래? 그럼 나 고향 한 군데 더 있는데. 나 청주에서도 엄마 아빠랑 좀 살았잖아. 그럼 청주도 내 고향이지."


하룻밤만 자면 한국 간다고 들뜬 아들이 그린 그림.  우리 저거 타고 고향에 잘 다녀오자


아이는 이렇게 쿨 하게 한마디 하고 쓱 가버렸다.  자기만 고향이 없다고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닐까, 정말 우리 아이는 고향이 없는 건 아닐까 하며 가슴을 졸이던 내 심정은 아는지 마는지 벌써 레고 삼매경에 빠졌다. 이제 하룻밤만 자면 나와 아이들은 내 고향, 아니 우리들의 고향 청주에 간다. 청주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애틋하게 추억할 수 있는 고향 자양분을 많이 많이 만들어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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