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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Sep 08. 2023

생활인으로 살기

니의 제1 정체성

1.

매미 소리가 멈춘 건 서운하고, 가방에 늘 넣어 다니던 소형 우산을 신발장으로 보내버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2.

한 계절을 보내고, 한 계절을 맞이하려면 집안에 손길을 줘야 한다. 이제는 너무 얇은 이불은 세탁해서 보관해야 한다. 한철 내내 수고한 소매가 짧은 옷들은 상자 속으로 보내서 소매가 긴 옷들의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 먼지 쌓인 가습기를 다시 꺼내고, 선풍기 날개에 쌓인 먼지는 닦아내야 한다. “’목이 긴 양말‘을 어디 뒀더라~” 혼자 살기 레벨이 제법 쌓인 나는 아무도 듣지 않는 타령을 하면서 가을용 양말을 찾았다.


나는 계절따라 집안을 정비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정성을 다해 살고 있단 느낌이 든다. 과거에 내가 미래의 나를 위해 애쓴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늦봄, 두껍고 목이 긴 양말을 잘 빨아 말린 뒤 예쁘게 접어서 보관해 놓은 상자를 초가을 무렵 발견한 오늘처럼 말이다.


’생활인으로서 살자‘.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독립한 뒤부터 나의 첫 정체성은 장녀도, 기자도 아닌 생활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잘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 하루도 움직이는 생활인.


3.

생활인으로서 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다들 알 거다. 다른 정체성이 훨씬 중요하게 느껴지는 날이 더 많기 때문이다.


4.

쫓기듯이 바쁘게 살면 내 생활보다 계절이 먼저 당도한 게 서러울 때가 있다. 이미 더워진 뒤에야, 혹은 추워진 뒤에야 허겁지겁 필요한 것들을 빠른 시간안에 찾다보면 “나 왜이러고 살지”싶다.


집이 잠만 자는 공간이던 시절, 자다가 갑자기 깬 적이 있다. 천 이불이 너무 얇아 추웠다. 빌딩 꼭대기에 혼자 서서 덜덜 떠는 꿈을 꾸다 깬 날이었다. 7월에 꺼낸 이불을 10월까지 덮고 살았으니 뭐 추울 만도 했다.


그날 밤에 울며 겨자먹기로 솜이불을 꺼내는데 기분이 찝찝했다. 빨지도 않은 천 이불을 아무렇게나 구겨서 보자기 안에 쌓아야 하는 것도 찝찝했고, 쾌쾌한 냄새가 나는 천이불을 그대로 덮고 자야하는 것도 찝찝했다.쫓기듯이 살면 이렇게 된다.


5.

집안을 좀 정리하고 나서, 밥도 챙겨먹고 커피를 마셨다. 작업실 방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빌라와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 동네는 산책로가 없다. 차로가 곧 산책로다. 햇살이 좋길래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보는데 익숙한 두 사람이 보였다. 늙은 개를 산책시키는 이웃집 여자다.


퇴근하고 밤늦게 집 앞에서, 주말엔 오후 한낮 집 앞에서 그 늙은 개와 여자를 자주 봤다. 그 늙은 개는 잘 걷지 못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매우 느리게 걷는다. 그래서 여자가 늘 뒤에 가까이 붙는다. 혹여라도 넘어질듯이 개가 갸우뚱 하면 여자는 바로 주저 앉아서 두 손을 개의 몸통 가까이에 댄다. 개가 땅에서 익숙한 냄새라도 찾는듯이 가만히 멈춰서 코를 킁킁대면 그 뒤통수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나는 집 앞에서 그 둘이 보일 때면 걸음이 느려졌다.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였다.


오늘도 둘은 느릿느릿 내 집앞을 걸었다. 어쩐지 쳐다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나는 못내 눈을 못 뗐다. 그 늙은 개가 느릿느릿 걷는 걸 지팡이를 쥔 할머니가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봤다. 그 할머니도 느릿느릿 걸었다.


나는 느릿느릿 행복해졌다.


6.

이렇게 고요하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늘 여름이 가면 마음이 쓰라렸다. 너무 사랑하는 건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이번 여름도 ‘덥다’는 말을 달고 살았음에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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