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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쉘위 Dec 17. 2022

아무도 가지 않은 그 길.

첫 눈이 왔다.

진안에 온지 4년만에 오랜만에 눈다운 눈이 왔다. 매년 겨울 마다 따뜻한 나라로 피신 다니며 살아왔었는데 그 해 겨울 눈 덮인 논밭을 혼자 걸으며 내 키 반만한 배낭을 메고 열흘동안 침묵 명상코스에 참석하기 위해 이 곳에 왔었다. 더운 여름에 땀을 한바지 흘리며 푸르른 논밭을 걸었던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고요하고 차분한 겨울 논밭길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평화롭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열흘간의 침묵 명상 코스를 마친 후 이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연히 마을 이장님을 만나서 집을 구하고 바로 계약을 하고 배낭 하나 메고 다시 내려왔다. 모든게 일사천리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나만의 보금자리가 생겼고 어디를 가지 않아도 행복했다. 추운 겨울을 견딜정도로.


보일러가 터지고 수도관이 터지고 전기가 나가고 방안에서도 입김이 나오고 겨울 내내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서 전기 포트를 끓여 가며 겨우 씻기만 해도 불평 불만 한번 해본적 없었다.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내 안의 야생이 깨어나고 살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단 한번도 초라하거나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닌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먼저 떠올랐고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를 누리며 살고 싶었다.


그러다 가끔 도시에 다녀오면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다시 나의 보금자리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순간 순간 집중하다보면 잡 생각들은 사라지고 그라운딩 되었다. 항상 뭔가 붕 떠있는 거 같이 살다가 흙을 밟고 흙을 만지고 내 보금자리를 가꾸고 삶을 지어가면서 내 영혼의 뿌리가 진안의 땅에 안착할 때 쯤 진안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깊게 내린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아마도 내 영혼은 정착이 힘이 부족하다보니 잘 안착한 뿌리를 의지하고 싶었던 건가. 나는 안착이 아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정착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그런데 요즘 나는 깊게 뿌리내리는 삶이 아닌 어디든 바람처럼 흩날려도 살아가는 민들레나 들꽃의 영혼이 나와 닮은 것 같다고 느껴졌다. 깊게 뿌리 내리려고 하면 땅 위로 열매들을 맺지 못하는 거 같은.


서로 다른 토양에서 자라온 뿌리들이 뒤엉켜 어떤 양분도 흡수하지 못하고 서로 죽어가고 있는 느낌이 요즘 자주 들었다.


오늘 내가 처음 진안에 내려와서 걸었던 그길을 다시 걸었다. 엉켜있는 뿌리들을 다치지 않게 풀어내고 다시 새로운 흙을 갈아 줄 때가 온 것 같다.


아무도 걷지 않은 새하얀 눈 길의 발자국을 낼 때의 기분이 좋아서 오늘은 반나절 내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찾아 걸어다녔다. 사람 한명 안다니는 시골길은 조용하지만 눈 오는 날은 더 고요하다. 그렇게 걷고 걷도 또 걷다보니 또 길이 보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그 길. 내가 길을 만들면 내 발자국이 나를 만들어 주는 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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