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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Oct 05. 2017

아빠는 내 인생의 지축이었다

20150317

아빠는 내 인생의 지축이었다.  
 
성장기 전반에 걸쳐 아빠의 부재가 여실했는데도,
아빠는 그저 새벽에 술취해 들어오는 같이 사는 사람에 불과할 때가 많았는데도,
그 많은 앨범을 통틀어 네가족이 단란히 찍운 사진 몇 장 건지기 어려울만큼 바깥일에만 여념이 없었음에도,
그런데도 이상하게
존재감이 대단했다.  
 
우리집의 중심이었고
내 생애 가장 멋진 선생이면서도
가장 크게 나를 실망시킨 장본인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마음이 따뜻한 남자이면서도
가장 매몰차고 차가운 사람이었던.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아꼈지만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했던 존재.  
 
엄마든 할머니든 누구든 아빠한테 조심스레 건넬 말이 있으면 나를 앞세워 운을 띄우기 일쑤였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남원 시내 누구 하나 조의원을 못말려도 딸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 이상타"  
 
초등학교 전교 부회장 선거날이었다. 등교하는 나를 붙잡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성실아. 선거에는 반드시 승패가 뒤따른다. 될 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지. 안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당선된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건네라. 선거에 이긴 사람보다도 그렇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멋진거야."라고 가르쳐주셨다. 살면서 적지 않은 선거를 거쳤던 나는 그 말을 늘 마음에 새겼다. 아빠의 DNA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내 인생 행보마다 더욱 아빠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아빠는 내 결혼의 제 1 중매자나 다름없다. 나는 부모님의 결혼사를 목격해오면서 끊임없이 다짐했다.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다. 나는 불타는 사랑따위 믿지 않겠어. 무조건 자상하고 제 가족 먼저 위하고, 뭣보다 남들 앞에서 내 말을 자르지 않는 남자를 만나리." 
그리고 딱 그런 남자와 결혼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만큼 자리를 잡지 못했던) J를 결혼상대자로 데려갔을 때 아빠는 딱 두어시간 외출하고 돌아오시더니 
"그래. 내가 속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네 인생이니까 네가 선택한 남자를 믿어주겠다."시며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셨다. 장장 일년동안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엄마와 오빠를 설득해 웨딩마치를 이끌어주신 분도 단연 아빠였다. 언젠가 아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실 니가 시한부 인생을 데려왔더라도 고민끝에 나는 네 손을 잡아줬을 거."라고. 너를 키우는 내내 그렇게 다짐해왔다고. 나 역시 그런 신념으로 삶을 살아왔노라고. 내가 아는 한 아빠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남자를 끊임없이 증오했음에도 존경하고 사랑해마지 않았나보다.  
 
몇년 전 아빠가 갑작스레 현역에서 은퇴하셨다. 딱 내 나이 때에 의원이 되어 장장 이십여년간 자리를 지켜온 삶이니만큼 급변해버린 처지?를 소화해내기 어려우셨겠지만 그 또한 멋지게 해내셨다. 어느새 영락없는 호호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아빠. 손주 이발 시키고자 마루타로 본인 머리칼을 먼저 잘라내고, 우는 손주를 위해 (임플란트를 위해 임시로 껴놓은 보조)이빨도 서슴없이 뽑아내 영구 웃음을 건네오는 그런 할배.  
 
정후랑 시장 구경 하시는 아빠 뒤를 따라가면서 다시 한 번 가족의 의미를 생각한다. 더이상 나를 표현해줄 수 있는 명함이 없을 때, 나를 위해 놓인 책상이 없을 때, 화폐로 환산될만한 밥벌이를 못하는 구성원에게도, 가족은 더 없이 따뜻한 곳이고 언제든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있는 엄마품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을 유지한다 여겨왔던 두분의 요즘을 보면서 알았다. '아, 사랑이 식었던게 아니라 사랑 이외의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이 혼재되어 있어 문제였구나.' 힘을 잃고 경제력을 서서히 잃고 사회적 매력도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데 그런데 서로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는게, 배려하데 된다는게 아이러니다. 인생의 묘미다.  
 
둘째를 유산했을 때였다. 정후 돌만되면 다시 사회로 나가라며 '둘째 가지면 죽여버리겠다'고까지 농담반진담반 건네시던 아빠말에 임신소식조차 맘편히 말하지 못했던 때. 임신했었단 말과 함께 유산했단 소식부터 전하게 됐다.(물론 엄마가 했지만) 밤 중에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눈물을 참으시며 되뇌이셨다. 
"창식아. 성실이 잘 위로해줘라. 이제 너희 하고 싶은대로 살아라. 내가 남은 욕심을 버리마."
그리고는 밤새 우셨다 했다. 내가 환영하지 못해 새생명이 제대로 오지도 못한 채 떠나버린 것만 같다며. 그 말을 듣고 나도 울었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이후에 그 날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담배피는 아빠에겐 나중에 애 안 맡긴다던 스무살 딸내미 말에 삼십년가까이 피어온 담배를 한 번에 끊었던 아빠. 내가 정후만한 때 아빠가 쓰셨던 편지를 우연히 보았다. 
'여보. 성실이는 여자애지만 기가 당찬것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소? 잘 키워보세.'
.
.
평소에는 과태료 부과 고지서마냥 딱딱하게 문자하시는 아빠가 뜬금없이 다정한 문자를 보내오셨다. 
'사랑하는 우리 딸. 고생많았다. 사랑한다♥' 
 
그 전날 밤 아빠와 함께 '아빠를 부탁해' 재방송을 보았기에. 청소도 잘해주고 다정한 조민기를 보면서 
"나 같은 아빠가 저깄네."하시길래 나도 모르게 "청소 열심히 하시는 것만 같네요. 저 아빠는 다정하잖아요. 아빠는 아니지. 절대 아니에요.."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 말이 마음에 걸리셨던건가,우연일까? 
 
연유야 어쩌든지 
아빠,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스물둘 이른 나이부터 아빠란 운명을 짊어 져 온 당신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 당신같은 선배요, 부모가 될게요.♥ 
 
아빠의 자랑이었던 성실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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