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부터의 자유, 엄마로서의 자유. 그리고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오랜 시간 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의 자유를 갈구해왔다.
누구도 내게 짐지워주지 않았지만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이름. 보이지 않는 그 손의 이름은 다름 아닌 "엄마".
서른 해 가까이 조성실이란 고유명사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내 입에서 "엄마"란 단어가 튀어나올 때 남들은 당연히 두 아들의 엄마이면서 '정치하는엄마들'의 열혈 활동가인 나의 얼굴을 떠올리겠지만, 그런 나에게 "엄마"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 엄마" 곧 그 자체다.
엄마가 된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
"이영자"란 자신의 이름보다 "엄마"란 대명사를 더 오래 붙들고 살아 온 사람. 소녀였고, 여자였지만, 그 모든 이름보다도 엄마란 이름에 더 끈질기게 붙들려 온 그녀의 시간들, 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그 사실은 엄마가 된 이후에도 변함 없다. 아이가 크게 다쳤을 때, 아이가 아파 열이 펄펄 오를 때, 아이를 낳았을 때, 뱃 속을 꽉 채운 아이 때문에 밤잠 이루지 못 하고 뒤척이간 순간들, 아이들이 발산해내는 일상적인 소란에 압도당할 때.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내 엄마의 시간을 떠올린다. 지금의 내 시계가 머잖아 엄마의 시계로 바꿔 흐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구도 세월을 붙잡을 수 없기에, 이 시간을 따라가다보면 내 오늘이 곧 엄마의 오늘에 맞닿는다. 그 연장선상에서 나의 오늘이 해석된다. 엄마에게도 있었을 시간, 엄마도 겪었을 고통, 엄마도 벅찼을 환희. 그 터널을 지나 이제 우리는 기껏해야 일년에 너댓번을 만나고 길어야 2박 3일의 시간만을 함께한다. 그 외의 시간에 우리를 주로 연결해 주는건 전화기 너머 건너오는 서로의 목소리와, 아이들의 얼굴로 가득찬 영상통화, 딱 그 정도다. 이상하게도 그런 엄마의 오늘을 생각하다보면 나의 오늘, 이 분주함과 압축된 인내가 사정없이 고마워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엄마가 아닌 조성실 나 자신으로서의 이름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솟구친다. 내 이름 뿐 아니라, 우리 엄마의 이름을 찾아주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엄마로 호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나의 이름, 엄마란 이름으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잃어버린 이름들을 찾을 수 있도록 싸우고 싶어진다. 엄마란 정체성을 뜨겁게 껴안으면서도, 차갑게 던져버리는 이 모순된 일이 "엄마"란 이름 안에서 가능해진다.
엄마는 내가 한 번의 유산과 두 번의 출산을 겪는 모든 고비마다 내 뱃속의 아이가 딸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셨지만, 정작 나는 딸이란 이름이 너무나 무거웠다. 한 때는 내 세계의 전부였고, 하늘이었던 엄마가, 때론 친구였고 동지였던 엄마가, 어느 날부턴지 부담스러웠다. 끝이 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사랑과 불화, 그 끈적거림을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엄마에게도 욕망이 있고, 엄마도 나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는 평범한 존재란 사실을 알게 됐던 그 날. "엄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보여?"라고 묻던 내게. "나도 힘들 때가 있어. 그냥 우울할 때도 있고. 왜냐고 묻지 말아줘. 그냥 너처럼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는거니까."라고 돌아서던 엄마의 뒷모습, 우리를 에어싸던 엄마의 설거지 소리, 달그닥 달그닥 그 소리를 조용히 압도하던 엄마의 정적. 울고 있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던 엄마의 뒷모습. 그 낯설었던 장면. 우리 관계의 격변의 시작이 언제부턴지 더듬다보면 그 기억에서 멈춘다. 고2, 중간고사인가를 마치고 남원집에 내려와 있던 토요일 오후였었지 아마.
그 날 이후로 나는 엄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엄마는 나의 자유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나는 스스로 엄마의 존재에 구속되었다. 나는 곧 엄마의 젊음이었고 내 삶은 곧 엄마를 희생제물로 맺어진 열매처럼 느껴졌다. 엄마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 불가능했다. 엄마는 내가 그 누구보다 안정되게 살기를 바랐고, 나는 모험을 바랐다. 엄마는 내가 엄마와는 다르게 살기를 원했지만, 나는 엄마처럼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의 꿈이었던 내가 다시 엄마의 자리로 회귀했다. 엄마의 희생이 부담스럽고 싫었지만, 뒤돌아보면 인생의 위기마다 그런 엄마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그 기억이 나를 엄마의 자리로 소환했다. 엄마를 보상해줄 순 없지만 내가 엄마 역할을 하면서 누군가의 절대적인 필요가 된다는게 좋았다. 엄마에게 평생을 바랐지만 결국엔 도달할 수 없던 온전한 합일의 상태, 영혼의 친구로서의 그 관계가 아이와는 가능할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잘 하면 달라질 수 있을거야. 어쩌면 엄마와 나 사이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불협화음은 무언가 불완전하고 부족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일거야, 내가 좀 더 노력하고 공부하면, 그보단 나아질 수 있을거야. 내 뱃속의 아이는 나이면서 곧 내가 아닌 존재였기에, 이 작은 생명과는 무언가 완전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을거라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얼마 못 가 폐기되었다. 아이는 아이 자신이지, 내가 아니었다. 내 몸 속에 존재하지만 온전히 다른 타자. 따라서 내 기대는 본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사회에서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가부장적인 불합리와 여러 형태의 차별과 폭력들은 나를 더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지배적인 아빠의 모습이 싫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아빠를 사랑했다.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부분도 많았다.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명확한 가해자가 없단 생각에 다다르면 한 없이 혼란스러워진다. 엄마도 나도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혀 있는 기분이었다. 유추해가다보면 아빠 역시 명확한 가해자만은 아니었다. 제기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야. 혐오할 대상이 명확했다면 나았을까. 내 불안과 혼란, 분노를 속편히 발산할 수 있었을까.
지난 토요일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운전해 정치하는엄마들 정기집담회를 가던 길이었다. 한강 주변을 달리고 있는데 불현듯, 끊임없이 나를 붙들던 그 손,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시나브로 자유해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엄마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외쳐 온 투쟁의 순간들, 그 와중에 '엄마의 딸'로서 자유로워진 내가 서 있었다.
"미안 엄마, 그치만 내 잘못은 아니었어."
내 입을 툭 튀어 나온 혼잣말.
그렇다.
내 잘못은 아니었다.
내 탓은 아니다.
내가 느껴온 분노, 상처, 혼란 이 모든 것들이 정당한 감정이었고, 내가 바랐던 것들이 우리의 당연한 권리였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엄마를 마음껏 놓아드렸다.
내 20대를 관통하던 후회, 미안함, 죄책감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었음을.
엄마의 자유를 구속하고,
여러 형태의 폭력과 차별로부터
우리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무책임의 근원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던 어린 아이 조성실이 아니라,
이 사회의 잘못된 구조였단 사실.
그 사실이 비로소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엄마는 내게 더 이상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마음의 손을 내밀어 엄마와 연대한다. 우리는 평생을 동행할 벗이자 동반자가 된다.
엄마의 문제를 위해 대신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괴롭던 나,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 지 분노해야 할 지 몰라 종종대던 나 자신은 사라졌다. 엄마를 대신 해 싸워주지 못했단 자괴감에 또 무력감에 움츠렸던 아이는 사라졌다.
엄마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고,
이 문제가 곧 내 아들과 딸들의 문제임을,
그래서 우리가 연대해야함을 소리치는 나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 사실이 내 삶을 새롭게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다.
저출산 문제 해결의 키가 돈이 아닌, 성평등한 사회 건설과 노동시간 단축에 있음을 명시하는 순간, 싸워야 할 대상과 바꿔야 할 대상이 분명해진다. 엄마는 피해자, 아빠는 가해자, 나는 방조자란 불분명한 구도가 개편되자, 남의 문제였던 일들이 곧 나의 문제로 치환된다. 언론 인터뷰 도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정치하는엄마들을 시작한 이후 가내 가사분담과 자녀양육이 전보다 더 잘 분담되고 있느냐고. 나는 답했다. 부부간에 조율해야 할 영역이 일면 존재하지만, 한정된 시간과 분명한 임금격차를 전제한 상태에서 답을 찾아야한다면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라고. 나아지는 건 거의 없다고. 우리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전제, 바꿀 수 있었지만 누구도 바꾸지 않았던 그 전제를 바꿔야만 우리의 변화가 가능해진다고. 노동시간이 줄지 않고, 성별 임금격차가 해결되지 않는데, 어떻게 엄마들이 이름을 잃어버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꼭 이런 답이 돌아온다. 그런 변명은 그만하라고. 그 와중에도 보란듯이 모든 걸 잘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능력 없는 사람들의 핑계일 뿐이라고. 혹여 이 글을 읽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누군가가 있다면 이번엔 이렇게 묻고 싶다. 그 극소수의 삶을 힘겹게 지탱해주고 있는 누군가의 잃어버린 이름과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본 적 있느냐고. 친정 어머니, 시어머니, 엄마로서의 자기 자신, 어쩌면 엄마와 아빠의 시간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어린 꼬마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절대적인 희생으로 유지되는 위태로운 질서, 그조차 극소수의 몇몇에게만 가능한 그 상태가 정상인건지, 그렇다면 아프니까 청춘이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느냔 그 말에도 동의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누가 더 힘든지 겨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개선해갈 수 있는지 머리를 모아야할 때라고 답하고 싶어진다.
텔레그램에서 정치하는엄마들과 대화를 하던 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내 아이를 온 종일 책임지고 길러주길 원하지 않는다."고. "일하면서도(사회적 이름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간답게 아이와 눈 마주칠 수 있는 시간, 그 정도의 권리를 원하는 거라고."
2017년 대한민국은 멕시코에 이어 OECD 국가 중 2번째로 최장노동시간을 자랑하고 있다.
OECD의 '2017 고용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2016년 기준 국내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천69시간으로 OECD 회원 35개국 평균(1천764시간)보다 305시간 많았다. 이를 하루 법정 노동시간 8시간으로 나누면 한국 취업자는 OECD 평균보다 38일 더 일한 셈이 된다. 한 달 평균 22일 일한다고 가정했을 때 OECD 평균보다 1.7개월 가까이 더 일한 꼴이다.
성별고용률 격차 및 성별임금격차 문제도 별반 다르지 않다. 15년째 OECD 1위를 지키고 있는 성별임금격차는 우리나라 여성노동문제의 핵심으로 손꼽히고 있다.
"요즘 당신 페이스북 보면서 누군가 내게 그러더라. 이전에 내가 알던 성실이가 아니라고. 너무 달라져서 낯설다고."
"예전엔 어땠고, 지금은 어떤데?"
"몰라. 말하는 태도나 내용이 너무 강해보인대."
맞다.
누군진 몰라도 그가 정확히 보았다. 내 변화를 정확히 읽어냈다.
아이를 낳고도,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엄마로부터의 책임감과 미안함에서 좀체 자유해지지 못했던 나, 그렇게 쳇바퀴를 돌던 십수년동안의 나는 달라졌다. 엄마란 단어, 그 단어가 주는 부담 위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맴돌던 나는 이젠 자신있게 답한다.
"맞아. 달라졌지, 내가.
그동안 내가 여러 사람을 두루 만족시키기 위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하고
말해야 할 것들을 보지 않고 지나쳤단 사실을 깨달았거든.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거야.
봐야 할 걸 보고.
말해야 할 걸 말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쉽게 살려고."
엄마 미안.
그치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
어쩌면 엄마가 서운해할지도 모르는 말. 그러나 비로소 우리 모녀관계를 더 단단하게 붙들어 준 말. 엄마와 나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우리가 연대해가야 할 명확한 방향을 분명하게 해주는 말.
이 말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해 줄수는 없음을 나도 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훗날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대로 사회가 아무리 변한대도
어쩌면 내 아들도 내게 같은 말을 하게 될련지 모른다.
변화한 사회에서도 개인의 선택이 주는 기회비용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고,
아이들은 부모의 희생 엄마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정체성을 마주할테니까.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변화해간다면
나의 말과 아이의 말은 그 무게가 달라질 것이다.
죄책감에서 책임감으로, 이내 감사와 사랑으로 그 함의가 색깔이 변화할 것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엄마는 정치한다.
[본 글은 '정치하는엄마들' 회원 개인의 글입니다. 단체에 대한 자세한 소개 및 활동 및 입장은 단체 공식 채널을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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