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보다 더 신난 엄마의 가을나기.
바야흐로 가을이다.
사방이 가을로 가득 찼다.
우수수 쏟아지는 가을의 흔적들. 삼십년도 더 된 아파트 단지가 여지없이 가을로 물든다. 빨갛게 노랗게 물든 온갖 나뭇잎들이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낙엽비를 잡기 위한 아이들의 소란이 시공간을 가득 메운다.
매해 그러했듯, 올 가을도 어김없이 아름답다. 특별하고도 완전한 계절.
아이들보다 더 신난 엄마가 날다람쥐처럼 뛰다니며 온갖 나무를 오르내린다. 높은 나무는 의자를 밟고서 나 혼자 오르고(높은 고목 위에 올라선 나를 바라보는(우러러(?)ㅋㅋㅋㅋ) 아이들의 동경어린 눈빛이란....+_+), 웬만한 나무는 아이들과 번갈아 또 같이 오른다. 나무에 올라 아이들을 불러본다. "얘들~아~~~" 내 부름에 답하는 건 눈앞에 선 이 아이들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화답해 오는 건 내 안에 숨어있는 어린 아이, 다름 아닌 유년 시절의 나다. 나를 꼭 닮은 아이가 "엄마"하며 달려 와 안기고, 수년간 결을 맞쳐 온 '우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올 때의 그 환희란! 그 순간만큼은, 타임슬립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유년의 내가 소환 돼 나의 아이와 뛰어 놀고, 악동들의 짖굿은 장난에 유년의 내가 어울려 응답한다. 가을과 아이들과 나와 내 안의 어린아이가 하나되어 뛰노는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이런 장면을 일컫어 '물아일체'요, '영화같은 한 장면'이라 하는 건가 싶어지면서 육중하게만 느껴지던 몸뚱아리가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경탄을 자아내는 자연과, 그 보다도 더 아름다운 아이들의 존재가 내 몸 구석 구석을 호랑이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고되고 외로우면서도 그 길을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건, 그 길목 어귀에서 만나게 되는 주옥같은 순간들 때문이리라.
며칠 전엔 아이들과 산으로 모험을 떠났다. 작전명, 이름하여 "가을을 담아오라". 눈으로, 귀로, 코로 가을을 만끽하고 담아 오는 게 그 날의 과제였다. 오가는 길에 만나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의 온도 그 냄새, 알록 달록 다채로운 가을의 모양과 색깔들을 차곡히 담아왔다. 다음 날은 단지 내 공터에서 놀았는데, 아이들은 그 지루하고도 익숙한 장소에서도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냈다. 흙 한 줌 보이지 않는 낙엽 위에 각자 자기 방을 만들고, 길을 내고, 고목 나무 뿌리를 지나 터널을 뚫는 상상을 해댔다. 얼핏 개미집 같기도 하고, 아키텍 문명의 신성문자 같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저들끼리, 바람 말곤 그 무엇도 우리 작품을 망칠 수 없을거라며 한껏 들떠있다. 이들은 이 평범한 땅 위에서 예술가가 되고, 건축가가 되고, 전사가 되었다. 돌의자에 걸터앉아 도란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한 아이가 다가와서는, 이모 집도 만들어 주겠다 한다. 그래. 이모 집은 도서관처럼, 마음껏 책도 읽고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곳으로 부탁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 아이들이 달려와 내 방을 만들어 주었다. 그 좁은 공간으로 아이들을 초대한다. 이름 하나 하나를 부른다. 모여든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깜짝 이벤트. 이모 방 구석 구석에 책이 떨어져있거든. 그걸 주어오면 읽어줄게. 저마다 마음에 드는 낙엽을 주어왔다. "나는 누구일까요?" "빨간 운동화" "나랑 놀아줘" "준후가 좋아." 등등 낙엽을 가져 온 아이와 연관된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니 도서관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소재가 다 떨어져갈 때쯤 마침 간식시간인 걸 알았다. 휴. 다행이다. 밑천을 들키지 않아서. 그 다음날이었던가. 본래 준비한 수업은 방향에 관한 것이었는데 구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나뭇가지 채집에 신난 아이들. 나뭇가지 두개를 드럼 스틱처럼 가지고 놀던 정후를 보고선,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각자 마음에 드는 악기를 찾아오자고, 그리고 동시에 소리를 맞춰보자고. 박자를 다르게 해도 되고, 방법을 다르게 해도 되고, 그냥 발을 구르며 춤춰도 되고, 이 모든게 합쳐지면 음악이 된다고. 리듬에 관해 풀어 설명하니, 한 아이가 되묻는다. "그럼 지휘자가 필요할거 같아. 누가 하지?" 그렇게 가을노래를 완성했다. 아이들과 함께 들어보자, 더 잘 할 수 있다며 재녹음을 하잔다. 오케스트라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남겨주려다보니, 두번째 녹음엔 내 나레이션이 많이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바람소리까지 더해져 의미있는 작품이 되었다.
이런 주옥같은 일상들 때문에라도
나는 늘 가을을 기다린다.
가로등에 비친 은행나무에 감탄하고, 도저히 담아지지 않는 가을 하늘과 햇살이 애석하다.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본래도 가을을 애정해 왔지만,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을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관념과 담론 안에 갇혀 있던 나를 '여기, 오늘, 우리'란 실존의 무대로 이끌어냈다. 아련하고도 헛헛했던 가을이, 아이들의 등장과 함께 완연하고도 선명한 노래가 되었다. 이 아이들이 또 가을이 나를 손짓한다. 그리고 속삭인다. 현재를 붙잡으라고. 현실을 직면하라고, 오늘 이 곳을 최선으로 살아내라고. 이들과 격의 없이 날 것의 가을 위를 뒹굴 떄마다 나는, 손끝에 와닿는 아이들의 살결에 벅차고, 품에 와 안기는 이들의 존재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채감과 책임감. 이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 보장받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엘지 떠올려본다. 나와 이 아이들, 그리고 이들의 친구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묵상한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 없이도 윤리의 최고봉에 도달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자식을 길러봐야 평균의 도덕에 가까스로 다다른다. 이런 세상에 너희들을 낳아 미안하다. 그러나 약속할게. 너희와 너희 친구들을 위해 언제까지고 희망의 낟알을 줍는, 촌스럽고 아둔한 사람이 기꺼이 되겠다고." 얼마 전 읽었던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박선영지음, 스윙밴드 출판)에서 발췌한 문구다. 이 부분을 읽고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좀체 문장으로 표현해 내지 못한 채 몇년간 내 입가에 맴돌던 말을 박선영 기자님의 이 문장들도 대체해본다. 이 가을, 아이들과 함께 그렇게 희망의 낟알을 줍는다.
다시 또 가을. 그렇게 아름답던 가을이, 이 아까운 가을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가을 끝에 다가올 겨울을 기다린다.
그리고 또 이어질 봄의 찬란함.
그리고 또 잊지 않고 가을이 우리를 찾아오겠지.
한 해의 열매가 부끄럽지 않게 주어질 한 해를 알차게 살아내야지.
그렇게 가을을 따라 살아가야지.
다짐하며 낮잠에서 깨어 날 아이를 기다린다.
[별첨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