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태진 Nov 17. 2021

불안과 마주칠 때 (3)

익히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되는 심리질환 중에 강박관념 및 강박행동이라는 심리질환이 있는데 그 표현 중 "강박적인"을 뜻하는 영어 표현은 "obsessive"입니다.  이 영어 단는 "무엇에 사로잡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이 뜻에 걸맞게 강박관념이나 강박행동에 시달리는 사람은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 듯이 또는 무엇에 홀린 듯 행동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불안에 대입해 보면 한번 심한 불안에 "사로잡히면" 무엇에 홀린 듯이 특정 행동을 하려는 경향을 띨 수 있는데 이때 특정 행동이란 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행동일 것입니다. 이때 "사로잡혔다"는 표현에 걸맞게 심한 불안은 시야를 좁혀서 불안을 야기한 대상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이는 마치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시험 범위에서 시험에 나올만한 부분을 골라서 주목해 외우는 현상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좀 말도 안 되는 상상일 뿐이지만 이틀 후가 시험을 치르는 날인데 어렵고 지겨운 시험공부를 하는 게 싫어서 또는 주관적으로 "내가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해 봤자 성적 등급은 올라가지 않을 거야. 그런데 뭐 하러 쓸데없이 힘들고 지겨운 시험공부를 해야 돼?" 하면서 시험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이틀 동안 머릿속으로는 "시험을 망치면 이러저러한 좋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텐데"하는 생각이 들고 마치 옆에서 누군가 그런 자기를 꾸짖는 듯한 느낌, 즉 "너는 할 수 있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시험 준바를 하지 않고 있다. 사실은 너는 시험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다"라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책망하는 듯한 그리 유쾌하지 않은 느낌을 주듯이 성가시고 불쾌한 불안이란 느낌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할 때 우리 내면은 끈질기게 바짝 따라붙으면서 불안을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 자기가 무슨 이유 때문에 불안한지 핑곗거리를 찾지 말고 정직하게 인정할 것을 재촉합니다. 


어떤 분들은 "불안을 인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오히려 더 힘들고 성가시기만 하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2차 세계대전 에 강제 수용소에 갇힌 두 유태인 집단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면 한 집단의 리더 격인 사람은 "신께서 곧 우리를 이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장밋빛의 낙관적인 전망을 한 반면 다른 집단은 자신들이 강제 수용소에 갇혀 있는데 언제 전쟁이 끝나고 게다가 독일의 패배로 끝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렇게 끝이 나서 자신들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나길 바랐다고 합니다. 그 뒤 전쟁이 끝나고 두 집단의 생존율을 비교해 봤더니 마냥 장밋빛으로 낙관적인 전망했던 집단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한 집단의 생존율이 훨씬 더 높았다고 합니다.  이를 거칠게나마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스럽고 힘든 감정은 각성 상태를 야기하는데  이를 평범하고 일반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흥분 상태"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 점점 더 커지는 수압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은 터져 버리는 것과 비슷하게 처한 현실의 상황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억지를 부려서 이 흥분 상태의 자연스러운 배출 통로가  막힌다면 신경은 더욱더 날카로워질 것이고 계속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거짓으로 왜곡한다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신경은 병적인 노이로제 상태로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첫 글에서 저는 불안의 사전적 뜻 중에 "마음에 미안함"이라는 뜻도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좀 비유적으로 표현해서 날카롭게 긴장된 마음에 미안하지 않으려면 마음이 간절히 전하는 신호를 정직하게 수용하면서 마음의 "상태"를 인정해야  할 텐데 그제서야 불안한 마음도 좀 진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마음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이지만 제 존재 자체, 즉 외부 자극에 정직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현 상태를 인정 받았기 때문에 제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소리 지르면서 악을 쓰는 것만큼은 멈출 수 있가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긍정"이라는 한국사회의 성공 신화를 살펴보면 "긍정"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내뿜는 언어적인 기운 때문에 이 개념에 어떤 문제 제기를 한다면 이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심지어 반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긍정 그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긍정성과 부자연스럽고 억지 춘향 식의 긍정성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인간의 "의지"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이 둘을 가르는 가장 중요하고 어쩌면 유일한 척도는 "처한 현실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힘든 감정, 이를테면 불안이나 우울 그리고 분노 같은 감정들을 자신의 것으로 정직하게 인정하는가?"입니다.  이를 좀 더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절대적인 긍정성을 옹호하기 위해 흔히 드는 예는 "병에 물이 반이 차 있는데 어떤 사람은 병에 물이 반씩이나 차 있구나"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부정적인 사람은 "병에 물이 반 밖에 차지 않았구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에 물이 반씩이나 차 있다"라는 판단이 어째서 긍정적인 걸까요? 그럼 이 물을 자기가 즐겨 마시는 비싼 술로 바꿔 보면 그 말은 좀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자기가 상당한 양의 좋아하는 술을 이미 마셨을 것이라는 짐작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긍정적"으로 판단한 사람은 술이 반 병이나 남았으니 전보다 더 자주 또는 많이 마셔도 되겠다"라고 생각할 개연성이 높아집니다. 반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술의 양이 생각보다 적어서 반 밖에 안 남았다고 판단한 사람은  전보다 술을 아껴 마시려고 자제하게 될 개연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이 두 경우 어느 쪽이 긍정적이라고 여겨지시나요? 니, 그런 판단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다시 병에 들은 물의 예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만약 병에 반쯤 들어 있는 물의 소유자가 지금 당장 마실 물을 찾거나 살 수 없는 환경, 이를테면 극단적인 예로 사막에서 길을 잃고 빠져나갈 길을 찾는 사람의 경우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자면 목이 몹시 말라서 신경 쓸 틈도 없이 물을 연거푸 마시다가 갑자기 "물이 얼마나 남았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병을 확인할 때 자신의 생각보다는 더 많은 양의 물이 남아 있다면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고 생각보다 병에 남은 물의 양이 적으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사막을 빠져나오지 못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이 물로 사막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의 갈증이 충분히는 아니어도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제부터는 물을 마시는 횟수나 양을 최소한도로 줄여야겠다"라고 각오할지도 모르고 또는 어떻게 이 사막을 빠져나가나 하는 절망 때문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반 밖에 남지 않은 물을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다 마셔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내면이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또는 닥칠 것만 같은 위험이나 문제에 대한 경고음으로 불안이라는  신호를 보낸다고 말했는데 사막의 예처럼 눈 질끈 감고 최대한으로 갈증을 참아가면서 최소한의 물을 섭취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막에서 벗어나 생존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레 자포자기한 사람과 비교했을 때 생존의 가능성이 높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변수는 의지, 그것도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인간적인 의지"일 것입니다. 즉 "내가 이렇게 행동하거나 처신한다고 해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이렇게 애를 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원하고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즉 사람이 완전히 녹초가 되는 "최선"이 아니라 인간적 존재로서 내가 감당할 만큼만 노력하다 보면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어쩌면 조금은 비슷한 성과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어쩌면 원치 않은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될지도 모르는 경우를 "하나님, 맙소사"하는 식으로 각오하는 태도를 취할 팔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사람의 앞날을 미리 다 안다면 얼마나 안심되고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는데 그로 인해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불안은 종적을 감출지는 몰라도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미리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선택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과연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 잘문에 대한 저의 대답을  이제는 어느새 흘러간 옛적 가요가 되어버린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라는 노래 속 노랫말로 말씀드리면서 글을 맺습니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것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알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끝)

작가의 이전글 불안과 마주칠 때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