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사람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자녀 (1)

by 조태진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길가 벽에는 돌덩이를 비집고 큰 아카시아 나무가 있던 경사진 길 옆의 개량 한옥에서 살 때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 동네 친구들과 다방구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를 했었는데 집 안쪽에서 저녁밥을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노는 것을 중단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씻고 만화영화를 보면서 저녁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내준 숙제인 낱말 뜻 40개 적어오기 같은 지루하고 따분한 숙제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엄마의 반경을 벗어나서 머릿속으로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놀고 쉬고 공부할 수 있는 "자율적인" 선택의 폭이 훨씬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일 텐데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라던가 "그러다가 커서 뭐 될래?"라는 구박이나 핀잔을 간혹 엄마에게서 듣기도 했지만 그게 마음의 상처가 되지 않았던 건 그 표현을 하는 엄마의 어투가 제 마음을 겁먹게 만든다던가 몹시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식 속으로 웃으면서 때론 "그런 야단을 맞아도 싸다. 생각해 보니 내가 보기에도 내 잘못이 크거든"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과는 많이 다른 점은 "내 아이 잘 키우는 법"이나 "만점 엄마의 만점 육아" 같은 육아와 관련된 "전문지식(?)"이 홍수처럼 난무하는 그런 시절도 아니었기에 엄마들은 모성애라는 선천적인 본능과 그간의 제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엄마들은 잔소리를 하긴 했었지만 그냥 좀 귀찮았을 뿐 도망치고 싶고 화도 날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엄마가 하루 종일 옆에 바짝 붙어서 일일이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이른바 천천히 "자율성"을 기를 수밖에 없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그런 경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요즘 엄마들처럼 제 엄마가 가까운 옆에 온종일 붙어 있으면서 사사건건 간섭을 했다면이라는 상상만으로도 공기가 매우 나쁜 폐쇄된 좁은 공간에 갇힌 듯이 숨 쉬기가 갑갑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밝혔지만 "자율성"이나 "창의력" 같은 추상적 가치를 기르는 것에 반대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추상적 능력을 어떻게 풀어서 이해하는가와 함께 그에 대한 수단을 찾으려는 방식입니다. 이때 심한 모순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마치 외눈박이처럼 자율성을 기르게 한다고 "내 아이의 자율성을 기르는 레시피" 같은 책을 사서 읽고 그 내용을 암기한 뒤 자녀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경우에 그런 모순이 생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율성이란 수학시험에 나올만한 내용을 달달 외운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지지하고 도울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의 경험, 그것도 실수와 시행착오를 연거푸 겪어가면서 조금씩 눈에 잘 띄지 않게 정신괘 마음 그리고 몸에 익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율성이란 스스로의 생각과 고민을 통해서, 그러니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일이 간섭을 하지 않아도 갈지 자를 그려가면서 발전시킨 내적 능력괘 그 능력을 받치고 있는 내적 태도로서 다른 성질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데 밑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일진 몰라도 저는 엄마라는 존재는 어린아이의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새끼가 어느 일정한 시기가 되면 어미의 전적인 돌봄에서 벗어나듯이 인간도 특정한 시기가 되면 엄마의 포근하기만 한 품 속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이 작동한다고 믿습니다. 그 본능을 독립을 향한 본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이때 옆에서 일일이 챙겨주고 돌봐주는 것이 더 이상 도움이 되기보다는 성가시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정 시기가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새끼를 돌보지 않는 다른 동물의 어미들과는 달리 인간인 엄마는 자식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데 이때 그 관심의 질과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적 성향과 함께 사회적인 요소나 특징일 것입니다. 그리고 짐작 수준이지만 먹고 자는 활동 외에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도 적지 않은 몫을 할 텐데 이는 개인적 관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주제를 벗어나는 느낌이지만 전적으로 나만 생각하고 살겠다는 태도와 타인을 돌보는데만 전적인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태도는 서로 극명한 대립관계를 나타내지만 현실 속에서 이런 선명한 구분을 할 수 있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엄마라는 존재에 대입해 보면 자녀를 돌보는 행위와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일에 대한 관심은 얼핏 상호 적대적이어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저는 두 행위가 현실 속에서 성취가 가능해진다면 오히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승효과, 달리 말해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를 설명드리기 위해서 한 예를 들면 자신의 관심과 적성에 맞는 일을 적당히 하면 성취감과 자기 효능감을 느껴서 기분이 좋아지고 렇게 좋아진 기분은 다른 활동에 대한 의욕이나 동기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무조건 활동, 특히 눈에 보이는 활동을 양적으로 많이 한다고 해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정신과 마음 그리고 육체에서 그때그때 요구하는 휴식을 낭비나 쓸데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내적인 휴식을 "앞으로의 생산적 활동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정신과 육체가 피곤해져서 잠시 쉬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게 마음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상적인 경우이겠지만 그렇게 엄마 자신의 삶을 돌보고 개인적인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때 육아가 거추장스럽고 번거로운 의무나 작업이 아니라 선천적인 모성애에 바탕을 둔, 때로는 힘들지만 때로는 즐거운 활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성애라는 본능은 자녀에 대한 선천적인 관심이고 그 관심은 일차적으로 자녀의 육체적 성장뿐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성장에 대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엄마와 자녀 사이의 건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사생활, 즉 개인적인 심리적 공간을 뜻하는 프라이버시는 성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저는 그런 사생활, 즉 개인적 공간은 선천적인 성질의 것으로서 어린 젖먹이 아이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심리적 거리는 성장하면서 점점 멀어질 수 있는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씀드리자면 이 심리적 거리감은 양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질적인 성질의 것으로서 이는 성장과 그 성장을 바탕으로 한 독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 독립감은 부모, 특히 엄마와의 공생적 관계, 즉 로 심리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서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데 이는 개인으로서 각자의 주관적인 관심과 성향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건강한 관계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엄마와 자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ooo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한 개인으로서의 엄마와 ooo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한 개인인 자녀가 인간성이라는 보편적 성질을 바탕으로 건강한 심리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아이에게 자율성을 기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용인함으로써 이가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이렇게 저렇게 해 보다가 성공했다는 긍정적인 경험들이 차츰차츰 내면에 쌓여서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때 무척이나 중요한 점은 아이가 실수와 시행착오를 연거푸 겪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성취감에 바탕을 둔 자기 효능감과 그로 인한 자기 신뢰감을 축적하는 것인데 이때 동시에 자기의 한계, 그러니까 당장은 이룰 수 없다거나 이 문제의 해결에는 관심도 별로 없고 능력도 부족하다는 자기의 일시적 또는 태생적 한계를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제한적인 자기 효능감이 점차로 강해지려면 우선 옆에서 그를 지켜보는 엄마가 자녀에 대한 불안감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자녀에 대한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신뢰감은 역설적으로 자녀에 대한 무척이나 높은 기대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실은 자녀에 대한 엄마 마음속의 심한 불안감을 억지로 감추려는 위선과도 같아서 자녀가 원치 않게 실수나 시행착오를 하면 자기도 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녀를 책망하면서 자녀에 대한 심한 불신감을 밖으로 표현할 수 있고 이런 엄마의 반응을 경험하는 어린 자녀는 아무리 엄마가 짐짓 상냥한 말투를 쓰더라도 그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빼앗는다면 엄마애 대한 분노나 짜증과 함께 자신도 잘 모르게 자기 효능감은커녕 자기 자신을 점점 더 못 믿게 되고 엄마가 입으로는 격려하는 말을 해도 점점 더 자신감을 잃게 되어서 때로는 심한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세상이 점점 더 무섭고 두렵게만 느껴져서 엄마에 대한 병적인 공생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험이 커질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점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옆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자녀를 지켜보다가 자녀가 엄마 마음과는 달리 좀처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불안하고 속상한 마음을 견면서 자녀가 더 이상 어떻게 해 보지 못하고 도움을 청할 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해결의 실마리만 넌지시 주어서 자녀로 하여금 엉킨 실타래 같은 문제를 다시 제 손으로 해결해 보려는 욕구를 격려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엄마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텐데 이때 자녀에게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솔직히 밝히고 같이 상의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거나 그 문제가 반드시 당장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녀와 함께 포기하기도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애써 감출 필요가 없을 텐데 이를 통해서 자녀는 엄마도 자기처럼 그저 한낱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그로 인해 오히려 엄마에게 인간적인 친밀감을 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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