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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Dec 12. 2020

엄마의 홀로서기

나만의 몫


“치우지 좀.”


이 말이 화근이었다.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의 말은 편안했던 나의 밤을 더 이상 쉴 수 없게 만들었다. 둘째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졸려하며 내게 다가왔다. 방에 들어가기 싫어해서 아이를 재우려고 거실에 누워있었다. 그 사이 아이가 먹다가 흘린 아이스크림의 잔해들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아이가 팔베개를 하고 있어서 당장 치울 수는 없었다. 아이는 잠들락 말락 잠과의 투쟁을 하다가 결국 언니와 신나게 놀고 있는 아빠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아이에게 해방된 기분에 잠깐 휴식을 취했다. 사실 휴식이라고 생각도 못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 잠시 후 신랑이 나오더니 흐트러진 아이스크림의 잔해들을 보며 “치우지 좀.”이라고 짧게 말을 했다. 요 며칠 신랑이 회사일로 바빠 늦게 퇴근하고 집안일을 전혀 거들어주지 않은 상태였다 보니 집 안이 난리였다. 오늘 모처럼 아이를 잡아가며 거실을 깨끗이 청소해놓았던지라 나도 쉬어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있었나 보다. 그의 말 한마디가 나를 참 거슬리게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해주니까 더 바라네.’


올 한 해 코로나와 싸웠던 만큼 온몸으로 신랑과의 싸움도 이어져왔다. 왜 아이들이 먼저가 아닌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신랑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 행복이 먼저라는 나와의 생각의 차이가 좁혀지지를 않았다. 신랑이 불편해하고 힘들어해서 강의를 줄이고 글쓰기에만 집중하겠다고 얘기를 했다.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내 마음의 일이고 내 태도의 일이다. 신랑은 편해졌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겐 별다른 혜택이 없다. 엄마는 항상 바쁘고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 시간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왜 이해를 못할까. 신랑의 말이 한없이 서운하고 서러워하며 눈물지었던 예전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정돈된 마음으로 신랑에게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약간의 흥분 상태이긴 하다. 그동안 신랑이 내게 말해왔던 것들, 나에게 했던 행동들이 한 번에 몰려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나를 강타했다. 신랑은 그저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나는 그에게 몇 백배로 쏟아내고 있었다. 


“왜? 그거 좀 안치우면 어때서? 나도 잠깐 쉴 수 있는 거 아냐?” 


신랑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 웃음이 더 기분 나빴다. 


“아니, 그냥 말한 거잖아. 좀 치우지. 왜 안 치웠는데?” 

“안치운 게 아니라 봤는데 순간 잊은 거야. 애한테서 해방되어서 쉬고 있느라 잠깐 잊은 거라고.” 

“그래? 그럼 알았어.” 


항상 이런 식이다. 본인은 사실 확인만 하면 된다는 듯 너무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저 모습이 가끔은 짜증이 난다. 그때부터 몰아치던 폭풍 같은 감정을 그에게 내뱉었다. 그 감정은 옆에 있던 아이들에게로 몰렸다. 


“나는 내가 집안일을 잘하지 못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하고 싶어. 언제까지 애들을 자유롭게 키울 건데?” 

“언제까지?” 


이번엔 그가 내 말에 꼬투리를 잡는다. 


“여섯 살이 다 컸다고 생각하는 거지? 언제까지라는 말이 어디 있어?” 

“다 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잖아. 여섯 살이 되었으면 적어도 생활규칙은 지키게끔 알려줘야지. 언제까지 아이들은 어지럽히기만 하고 엄마 아빠는 그것 치우느라 시간을 다 쏟아야 하는데? 놀아도 자기가 놀았던 것은 치우게 습관을 들이고 아빠랑 노는 것이 좋아서 잠을 늦게 자면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일어나서 놀아주고 가면 되잖아.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노는 시간도 정해져 있고 그게 더 효율적이지 않아? 엄마 아빠의 삶이 주가 되어서 애들을 끼워 넣어야지, 어떻게 애들한테 끌려만 다니냐.” 


신랑의 표정이 가관이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수긍하는 듯 수긍하지 않는 모습으로 아이와 놀이를 시작하려고 한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거냐며 물었다. 보통의 우리라면 대화를 하는 거라고 이야기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맞아. 너 때문에 싸우고 있는 거야.” 


아이도 알았으면 했다. 항상 주의를 주워도 그때뿐 도통 들어먹지를 않는다. 이러니 어린이집도 거부하고 생활 습관도 다 무너져 버리고 어린이집 안의 단체 생활을 힘들어하는 거다. 아이가 어릴 때 내가 힘들어서 타임아웃을 외치며 방에 숨어버리면 신랑은 꼭 엄마의 부재를 더 키워 아이를 울려 방 앞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려주고는 했다. 나의 모성애는 신랑이 키워줬지만 신랑 때문에 오히려 없어진 부분도 있다. 충분히 지친 내 마음을 토닥이고 진정시킨 후 아이를 다시 만났다면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나는 다시 더 힘을 내어 아이를 돌보았을 테다. 신랑은 내게 그런 기회를 빼앗아갔다. 아이가 우는 소리에 나는 쉼을 포기한 채 잔뜩 찡그린 얼굴로 아이를 품에 안는다. 그런 엄마의 표정이 아이는 더 불안했을 거다.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에 더 매달리고 집착이 강해졌을 거다. 아이가 자란 후 엄마가 바삐 일하는 모습을 보이자 신랑은 또 그런 식이다. 엄마는 너희보다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엄마 혼자만 좋은 일을 한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희랑 놀아주지 않는 거다 등등. 아무리 장난 섞인 말이라도 아이들은 그 말 그대로 들을 수밖에 없다. 계속 듣는 말이 진짜로 믿어지는 순간이 온다. 반복학습은 꼭 이럴 때 잘 들어먹더라. 엄마의 부재로 아이들이 불안해할 때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고 아이를 토닥여주었다면, 믿음을 주었다면 우리의 관계가 이리 흐트러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세상 순했던 둘째조차 지금은 엄마 껌딱지가 되었다. 자다가도 엄마가 없으면 눈도 뜨지 못한 채 엄마를 찾아다닌다. 본인이 아이를 돌보는 것이 힘들어서 아이들이 엄마를 찾게끔 만들고 거기에 내가 반응하기를 바라는 신랑의 이기심은 아닐까. 신랑은 항상 아이들이 먼저라고 말한다. 내가 일을 하는 것에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도 하면서 아이들 밥도 잘 챙겨주기만 바란다고. 그러면서 부부놀이도 잘해주고 돈도 벌어오면 고마운 그런 완벽한 엄마이자 아내를 원하는 거겠지. 


“자기가 재택근무를 한다고 생각해봐.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도 아이를 우선시할 수 있어? 자기는 회사에 있으니까 8시간 동안 회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겠지. 나도 사업자 냈어. 나도 직장인이야. 그럼 나한테도 8시간의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일에 집중할 시간이 없으니까 짬나는 대로 일을 해야 해서 아이들한테 집중을 못하는 거지. 지금 주문이 밀려서 배송이 늦어지고 있는데 해야 할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냐? 또 그렇게 말할래?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주문을 받으라고? 자기는 팀장이 일 시키면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이니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냐?” 


신랑은 알았다고 왜 말 한마디에 확장 지으며 그렇게까지 말하냐며 그만 하자고 했다. 나는 한 마디를 더 붙인다. 


“나는 내 일 다 포기하면서 아이들만 잘 키워내고 나중에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아.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어. 나는 내 인생을 살 거야. 서로 불편함이 있다면 얘기해서 풀어나가야지 어떻게 엄마한테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살면 행복하지 않아.” 


신랑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큰 아이와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말은 상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허공에 떠다닌다. 


“00야, 엄마가 너무 심한 거야? 지금 불편하니?” 


아이는 등을 돌려 아빠와 놀이하며 대답한다. 


“나는 그냥 둘이 조용했으면 좋겠어.” 


그 이후로 둘은 똘똘 뭉쳐 내가 말을 해도 듣지를 않는다. 또 나만 나쁜 엄마가 되었다. 엄마를 마녀로 만들고 마녀와 싸우기 위해 남은 이들은 더 사이가 좋아진다. 신랑은 또 한동안 세상 고민 다 가진 얼굴로 나를 대하겠지. 나의 행복은 결국 다른 이들을 불행으로 이끄는 것인가. 나 하나만 포기하면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을까. 문득 나는 지금 이혼을 준비 중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서기를 위해 철저하게 나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이혼을 한다 해도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보다 먼저 앞서 나간 이들은 모두 가정을 지키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가정이 행복하고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거라고. 나 또한 그렇다.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행복해지기로 했었다. 주객이 전도된 건가. 옆에서 이해해주지 못하고 자꾸만 탓을 하니 나 또한 투쟁을 하게 된다.      








윤지회 글, 그림ㅣ사계절



그림책 『방긋 아기씨』에서는 태어나고부터 한 번도 웃지 않는 아기씨와 그런 아기씨를 걱정하는 왕비가 나온다. 아기씨를 웃게 해 주기 위해 왕비님은 좋은 옷을 지어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보고 우스꽝스러운 공연을 준비해도 아기씨는 말똥말똥 왕비님만 바라본다. 그런 아기씨를 방긋 웃게 만든 묘책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는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며 아이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내가 안타까울 수도 있다. 나 또한 몇 해가 지나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그 짧은 시간에 조금 더 잘해줄걸, 함께 해줄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초반의 시스템을 잘 만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해도 흔들리지 않을 기둥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엄마의 홀로서기가 아이들의 희생이 뒷받침되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가정을 지키며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또 고민해야겠지만 왜 그 고민은 나만의 몫이어야 하는지 참으로 속이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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