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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Dec 18. 2020

나를 가로막는 벽

벽 너머의 세상을 만나는 방법

올 한 해 열심히 달려오면서도 쉽게 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향 상 이 곳이 내게 안전한 곳이라고 인지를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낯섦을 빼낼 수가 있다. 그럼에도 글자로 이야기하는 것들은 가능하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줌 모임을 해도 비디오를 끄고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내가 끼어들어도 될 자리인가? 내가 말을 해도 받아줄 사람들인가? 항상 재고 고민하다가 더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끝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연말이라 한창 각 단톡 방마다 연말 모임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올 한 해 어려웠던 시간들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니 마지막도 함께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올해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한 모임에서도 연말 파티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나 또한 참여는 하고 싶었으나 그동안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나에게도 자격이 있는지 내가 그곳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운영자분이 먼저 참여의사를 물으며 그 시간에 그림책을 나눠줄 수 있느냐고 물어봐주었다. 단톡 방 대화뿐만 아니라 모임에서 운영하는 여러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 나를 잊혀 질만 하면 한 번씩 안부를 물어주고 으쌰 으쌰 기운을 돋아주는 참 고마운 인연이다.


연말 모임이 있는 그 날은 공방 창업 수업이 있는 날이다. 8시부터 10시까지 하는 강의를 마치고 연말 모임 2시간을 참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아이들과 신랑의 얼굴이 잠시 스쳐갔다. 그 날 강의가 있어서 아무래도 안 될 거 같다고 답을 보냈지만 얼마 전 내년부터는 OK 우먼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내년에도 분명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것은 나에게 주는 또 다른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조금 늦겠지만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때부터 고민에 들어간다.


무슨 책을 나눠줘야지? 그림책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기에 내용은 너무 무겁지 않아야 한다. 첫 그림책과의 만남이 재미있었으면 했다. 연말 파티인 만큼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해를 향한 기대감을 주면서 감동과 재미가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책이 필요했다. 보통은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이기에 육아하면서 읽었던 그림책보다는 새로이 만나는 책이길 바랬다. 그렇게 책을 선정하고 PPT를 만들었다. 그림책 자격증 수업을 들은 이후 PPT는 처음 만든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금방이라도 현장에 뛰어들어 활동을 할 줄 알았지만 이 넘의 두려움 때문에 프로그램을 열지를 못한다. 2020년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많았지만 차곡차곡 감정 창고에 쌓아만 두고 먼지만 수북이 내려앉고 있었다.


연말 모임은 목요일인데 제안을 월요일에 받았다. 3일 동안 책을 선정하고 PPT를 만들고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한다. 사실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신랑은 지방 출장을 가고 아이 둘은 가정보육 상태이며 밀린 주문과 하지 못한 과제들이 가득했다. 며칠 전 글로 썼던 D-day가 바로 오늘이다. 화요일에 책을 선정하고 수요일에 PPT를 만들었다. 목요일 당일에는 1시간 반 밖에 자지 못했지만 걱정은 뒤로 하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낮잠을 푹 자주었다. 연말 모임 신청자가 30명이다. 첫 데뷔를 30명 앞에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산 하나만 넘으면 다음은 쉽겠구나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년에 기관 강의도 진행할 계획이라 이렇게 경험을 쌓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리 예정되었던 공방 수업이 오늘따라 늦게 끝난다. 10시까지 예정되었던 수업이 마무리하는 시간만 30분이 더 걸렸다.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떨리는 마음도 느낄 시간이 없었다. 겨우겨우 모임에 참여했는데 이번엔 컴퓨터가 말썽이다. 인터넷이 불안정하여 멈추기를 반복. 아직 잠들지 않은 둘째는 졸려서 잠투정이 심해지고 4일 만에 독박 육아에서 해방시켜준 신랑은 고마움도 모른 채 언제 끝낼 거냐는 듯 눈치만 주고 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컴퓨터가 연결되자마자 바로 인사를 하고 그림책테라피를 시작한다. 너무 울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들어온 둘째는 금방 잠이 들 줄 알았으나 방을 나가자고 떼를 쓴다. 결국 이야기를 멈추고 아이를 신랑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냐 마는 나에겐 이 시간도 아이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를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을 나 스스로 넘어서고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보내고 나니 홀가분하게 집중할 수가 있었다. 맥주 한 모금 마신 것이 화르르 올라서 발음이 꼬이기도 했지만 이것도 나름 괜찮다. 모두의 처음은 항상 최악이라고 배웠으니까. 그림책을 읽고 3명씩 조를 묶어 대화의 창을 마련했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물쭈물하다가 말이라도 제대로 하고 나올까 걱정했는데 5분 후에 돌아온 사람들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며 아쉬워했다. 처음 들어가기 전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잔뜩 흥분된 모습들이 보였다. 그래! 이것이 그림책의 매력이지!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림책을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그림책 한 권 읽어주었을 뿐인데 소개해준 그림책이 너무 좋다며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더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두려워하며 시작하길 주저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더 오래 붙들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밤새도록 마음을 나누고 더 좋은 그림책을 소개해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기쁨이 이런 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레오리오니ㅣ 시공주니어



그림책 『틸리와 벽』에서 작은 꼬마 생쥐 틸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가로막고 있는  너머의 세상을 궁금해한다. 다른 친구들은 항상  자리에 있던 벽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틸리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상상하며  벽을 넘어가기 위해 실행을 한다.  너머에는 틸리가 상상했던 대로 희귀한 생물이 살고 있을까? 틸리는 벽을 넘기 위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벽을 기어오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다 우연히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벌레들을 보며 위로 넘어갈  없으면 아래로 가면 된다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나에게도 벽은 위로 힘들게 오르거나 깨부숴야만 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벽은 힘들고 어려워 쉽게 넘어가질 못했다. 틸디처럼 벽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다면 다른 방법을 택하면 될 일이었다. 내 안의 벽을 부수지 않고 벽 너머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벽은 나를 막아서는 답답함이지만 때로는 나를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도 있다. 오늘 나는 벽에 흠집을 내는 것이 아닌 벽을 넘어서기 위해 땅을 파고 내려가 보았다. 축축하고 기분 나쁠 느낌일 것 같은 예상과는 달리 특유의 흙냄새에 취해버린다.


이 기억과 몽글몽글한 마음으로 2021년에는 내 안의 벽 너머로 세상 구경을 하러 갈 수 있을 듯하다. 벽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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