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연의 나
어제 무리해서 주문 상품을 한꺼번에 제작했더니 역시나 오늘 새벽은 일어나지 못했다. 빨리 주문 건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싶었다. 머릿속에 다음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샘플을 만들고 싶은데 자꾸만 주문이 들어온다. 또르르. 행복한 비명이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나는 성격이 급하고 손이 빠른 편이나 쉽게 지치는 성격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일이 쌓여있으면 불안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얼른 일을 처리하고 쉬어야지. 저것만 끝내면 쉬어야지' 이런 생각으로 일을 빨리 끝내 놓으면 또다시 일거리가 가득 쌓이고는 했다. 쳇바퀴 돌 듯 일에 치어 죽을 뻔했다.
지금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핸드메이드 상품이라 배송이 늦는다고 공지를 했음에도 내가 불안해서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이것만 만들고 쉬어야지, 여기까지만 해야지'하고 발송을 끝내면 신기하게도 다시 주문이 들어와 있다. 내가 어느 정도만 주문을 받을 수 있는지 수량을 정하지 못하였기에 내 능력 이상의 것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 주문 꽤나 들어오나 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니 계속 주문 주세요 :D)
나는 무언가에 빠지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나 손작업을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이 고맙게도 엄마를 찾지 않고 둘이 잘 놀고 있을 때면 이때다 싶어 작업물을 들고 식탁에 자리를 잡는다. 한창 작업을 하고 고개를 들면 집 안은 이미 난리다. 작업을 하지 않고 있을 때는 아이들의 행동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곧 사고 칠 것이 예상되어 제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면 아이들도 숨을 죽이고 엄마 몰래 재미난 놀이에 빠져들어 버린다. 작업할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작업이 끝나고 나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우리 집 아이들은 왜 얌전히 장난감을 갖고 놀지 않고 바닥에 물감을 칠하면서 노는 걸까. 왜 책상에서 하지 않고 바닥에 풀칠을 하며 미술놀이를 하는 걸까. 온통 아이들 탓으로 돌리며 엄마의 분노 게이지는 끝까지 차오른다. 소리를 지르며 혼을 내지는 않지만 끝없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다 버리겠다, 다시는 안 사주겠다, 네가 어지럽힌 건 네가 치워라. 그러면 또 여섯 살 큰 아이는 기가 막히게 엄마보다 더 깨끗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청소를 말끔히 해놓는다. 그 모습에 나는 또 사르르 풀려 버린다. 단순한 아이들이 아니라 단순한 엄마다.
어젯밤에도 정신없이 작업을 하다가 고개를 들으니 집 안이 난리다. 개지 않은 세탁물에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겨울옷들, 작아졌지만 쉽게 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의 옷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제발 좀 놀아도 다 끄집어내진 말란 말이다! 바닥에는 먹다 만 과자들과 귤껍질들이 굴러다닌다. 말리지는 못할망정 함께 신나게 놀고 있는 애들 아빠를 보니 또다시 분노 게이지 상승! 공동육아가 어쩌니 말을 말든가 공동육아를 말 그대로 아이들 키우는 것만 공동업무라 생각하는 이 000 인간아! 미간을 찌푸리며 이게 집이냐 돼지우리냐 이런 곳에서 살고 싶냐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신랑이 얄미운 얼굴로 피식 댄다. 그래 웃기겠지.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결혼 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옷이었다. 혼자 복층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을 땐 2층 전체가 드레스룸일 정도로 옷이 정말 많았다. 지금도 입지 못하는 옷들이 장롱 두 칸 정도를 차지하고 리빙박스에 담아둔 옷도 여러 개다. 버리기엔 비싼 옷들이라, 이런 디자인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 같아서 이젠 팔 한 짝도 들어가지 않는 옷들을 붙들고만 있다. 그나마 결혼하고 이사를 하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내 옷을 꽤나 버렸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하다. 오히려 결혼 후 산 옷들은 쉽게 버리면서 아가씨 때 입었던 옷들은 버리지를 못하겠다. 나만의 훈장 같은 것일까.
어느 순간 내 몸뚱아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 더 이상 다이어트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나 무언가에 몰두할 땐 거의 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하기에 다리는 퉁퉁 붓고 어깨는 뭉치기 일쑤다. 그것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몸은 한 사이즈 불어나 있다. 나도 내가 이리 망가진 채 살게 될지 몰랐지만 아이에게서 엄마는 뚱땡이!라는 소리를 들을 땐 진심 화가 난다. 지방 흡입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다이어트는 다 해봤기에 이젠 다이어트도 쉽지가 않다.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아서 쉽게 시작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세상 예민해지고 체력은 떨어져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처리하면서 해 낼 자신도 없다. 가끔 엄마는 통화 중에 이 좋은 세상에서 이 예쁜 옷들을 입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왜 살을 빼지 못하느냐고 한심스러워한다. 그러게 말이다. 살이 빠지면 입을 수 있는 옷들이 한가득인데 그러면 옷 사는 돈은 줄어들 텐데. 아! 코로나 덕분에 외출할 일이 없어서 마약 잠옷만 주구장창 입고 있기에 옷을 살 필요가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림책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난 김에 해야겠다.
그림책 『뚱보 페트라』에서는 날씬해지고 싶은 아기 코끼리 페트라가 나온다. 날씬하고 우아해지고 싶었던 뚱보 페트라는 동물 친구들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는지 물어본다. 친구들이 알려준 방법대로 이것저것 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러다 다른 친구를 만나 신나게 물장구치며 놀던 페트라는 자신이 뭘 찾고 있었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외모지상주의에서 행복은 겉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어린 여섯 살 딸의 입에서 엄마처럼 뚱뚱해질까 봐 밥을 먹기 싫다는 말이 나온다. 자신은 홀쭉이라 예쁘고 엄마는 뚱뚱이라 못생겼다고 말한다. 쉽게 몸이 붓고 살이 잘 붙는 나는 결혼 전에도 유독 살에 대해서는 예민했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이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내 딸에게서 듣는다. 나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아이는 점점 더 심하게 장난을 걸고 나는 이제 정색을 한다. 그 말이 진심으로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말할까 걱정이 되기도 해서이다. 내가 살이 찌던 안 찌던 내 얼굴이 예쁘던 예쁘지 않던 나는 나일뿐인데 나 자체만으로 인정받았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잘록한 허리(심지어 23인치!!), 큰 눈, 찰랑거리는 머릿결, 예쁜 옷, 비싼 가방... 나를 포장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나 또한 사라졌다. 나를 부를 이름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이제 아이들의 이름으로, 신랑의 이름으로 대신 불리어지고 있다. 그렇게 옷을 좋아했던 내가 지금은 원피스 한 켠이 뜯어진지도 모른 채 아이를 안고 다니고 있다. 매일매일 귀걸이를 바꿔 차던 나였는데 안경을 제외하고는 몸에 걸치는 것이 없다.
나는 태어났을 때 4kg으로 꽤 우량아로 태어난 아이다. 내 본질의 모습은 원래부터 우량아였다. 그것을 거슬러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치장을 해오던 것들이 나의 가림막이 되었던 듯하다. 살면서 내가 의도하려고 하지 않아도 내가 처음 세상에 왔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뚱보 페트라처럼 내 몸 자체가 코끼리인데 기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겠지.
나는 지금의 나도 괜찮다. 정말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