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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Feb 04. 2024

로망과 노망사이

조용필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10집 Part.2/11집)


*그림 원작 - 강지수
 
그림의 무단 도용을 금지합니다.
소중한 나의 어머니께서 두 달간 매일 그리신 그림입니다.


나는 참으로 덤벙거리는 사람이다. 아주 어릴 적엔 세발자전거를 산 지 하루 만에, 분홍 샌들은 구매한 지 한 달 만에 잃어버렸다. 좀 더 커서는 설거지를 하면 접시를 깼고, 전자제품을 만지면 고장이 났다. 내 어머니는 어리숙한 나는 나와는 전혀 달랐다. 


전업주부셨던 어머니는 일재간이 있고 총명하여 단정한 집안 정리, 빈틈없는 아이 돌봄, 뛰어난 음식 솜씨로 주변에서 인정받았다. 매일 바뀌는 내 헤어스타일과 정갈한 내 도시락 반찬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였고, 명절에 어머니가 해간 음식은 친척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큰 인정을 받아 여기저기에서 음식 부탁을 받으셨다. 


손재주 있고 일재간 있는 어머니. 주변에서 항상 칭찬을 듣는 어머니. 그러나 사실은 그래서 더욱 힘든 일들이 많았던 어머니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항상 분주했다.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일상에 더하여 본인의 재주 덕분에 주변에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들어오는 과도한 부탁들을 다 처리하다 보니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은 어머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도 단 한 가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그림'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는 그림이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진지하게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모든 집안일이 끝난 뒤 밤늦게, 혹은 주말 오후에 잠깐 짬을 내어 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짧게나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그림을 그릴 때면 듣는 노래는 거의 정해져 있었으니, 바로 조용필의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이었다. 


주말에 이 노래가 '반복 듣기'로 들려오면 초등 고학년에 접어든 나도 어머니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조용필의 익숙하고 친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책을 읽곤 했다. 나는 책을 읽다가도 시선을 가끔 들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당신께서 원하는 순간을 살고 있는 행복감이 내게도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내가 이 음악을 들으며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그 순간의 충만함은, 어쩌면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의 노래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해 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단한 삶을 그래도 함께하는 이와 있어 건너갈 수 있음을 고백하는 장편서사시인 이 가사의 주제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들을 때 어머니와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부분은 서로 달랐다. 




'먼 데서 온 것이라고 하면 다 아름다워하는 형제들아' 하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그렇다, 먼 곳은 어디든 아름답다. 먼 곳은 멀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먼 곳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나는 책을 읽다가도 이 부분만 나오면 글줄에서 눈을 떼고 노래에서 이야기하는 그 먼 곳이 어디일까 상상했다. 내 상식 수준을 최대한 끌어와 일본, 중국, 미국, 남미와 유럽의 여러 나라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나 또한 배를 타고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먼 곳은 어느샌가 시간적으로 그 어느 먼 곳에 있는 나의 모습이 되고는 했다. 대학을 다니는 나의 모습, 책 속 이야기처럼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나의 모습, 결혼을 하는 나의 모습, 세계를 누비며 나이 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하여 노래 가사 속 표현처럼, 그 먼 곳은 멀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삶에 대한 모호함에 대한 느낌으로 이 노래를 대하였다면 어머니는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으로 이 노래를 대하셨던 듯했다.


선생님은 이 세상 어린이가 가지는 첫 번째 꿈
어린 시절 내게도 그런 꿈이 있었지
그때 나는 행복했었지
같은 꿈을 꾸면서 자랐는데
가는 길은 왜 달라졌나
아직도 그 골목엔
내가 두고 온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있을까


어머니는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가도 노래에서 이 가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항상 따라 부르셨다. 때로는 가냘프게, 때로는 목청껏. 20분 가까이 되는 그 노래가 몇 번을 반복해서 흘러나와도 어머니는 이 부분이 나오면 그렇게 똑같이 따라 부르셨다. 나는 책에 빠져 있다가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아, 그 부분이구나.' 싶어 고개를 들고 함께 노래에 귀 기울였다. 


어머니에 따르면, 어머니도 어릴 때 선생님을 꿈꾸었다고 하셨었다. 꿈을 꾸며 공부도 부지런히 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여자'라는 편견에 의해 사회생활을 금지당했고, 전업주부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노래의 이 부분을 따라 부르다가 가사가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면, 따라 부르기를 멈추고 꼭 이렇게 덧붙이시고는 했다.


"내 꿈도 선생님이었는데. 내 꿈도..."


청소년기에 접어든 나는, 노래의 특정 부분을 열심히 따라 부르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삶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한창 빠져 있던 러시아 고전 소설에 나오는 비운의 주인공이 바로 어머니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혹은 '달과 6펜스'처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통쾌하게 삶을 쟁취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기적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저 '엄마'로서 살아주기를 바랐다.


내 나이가 벌써 그 당시 엄마 나이 즈음이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른 지금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고 계신다. 그리고 어머니는 또한 여전히 그림을 그리신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손자들을 보는 틈틈이. 그림으로 이름을 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즐겁게 그림을 그리신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가 석류 그림을 완성하셨다. 우리 집이 좀 더 잘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매우 정성스럽게 그린 그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석류 그림을 가만히 보시더니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전시회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말을 들은 나도 전적으로 찬성을 하며 나섰다. 어머니는 전시회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지만, 곧이어 순식간에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리셨다.


"이 나이에, 내가? 노망이라고 하지 않을까?"


어머니의 말에 내 속엔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살아왔던 어머니의 삶, 그런데 당신께서는 여전히 꿈꿀 권리조차 없는 듯 여기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노망이라니! 로망이지!"


꿈을 꾼다는 것이 나이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꿈꿀 권리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 또한 여전히 꿈을 품고 살고 있다. 어쩌면 죽기 직전까지, 내 꿈은 계속 새로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발끈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말에 내 꿈도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일 게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어머니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응원하고 있다. 꿈을 꾸는 한 인간으로서 꿈을 이루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나도 희망을 얻고 싶은 것이다.



오늘 아침 내가 행복한 이유는 이런 거지
오늘 아침 내가 서러운 이유도 그런 거야
청춘이 아름답다 하는 것은 환상이지 환상이라야 해
지금부터 시작되는 시간들이 최상이 되어야지
아무것도 나는 가진 게 없다네 없다네
재능이나 사명 남겨줄 가치도 모른다네
그러면서 무엇인가 기다리고 무엇인가 찾아서 헤맨다네
언제나 찾아오는 아침처럼 희망 하나 남아서...



노래 가사처럼,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환상이라야 한다. 사실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시간들이 최상이라야 한다. 나도 어머니도 이제는 청춘이 아니다. 나도 어머니도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꾼다. 언제나 찾아오는 아침처럼, 우리는 희망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 

매일 아침을 맞이할 때 나는, 노래 가사와 같이 서러움을 느끼지는 않으련다. 대신 매일 아침에 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최대한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꿈을 응원하고, 부모님의 도전을 격려할 수 있음에 행복해할 것이다. 


나이를 떠나, 지금부터라도 우리 함께 꿈꾸기를.

부디, 우리 삶에 노망이 아닌, 로망이 가득함을 믿기를.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작곡 김희갑, 작사 양인자, 노래 조용필)

오늘 아침 내가 행복한 이유는 이런 거지
오늘 아침 내가 서러운 이유도 그런 거야
청춘이 아름답다 하는 것은 

환상이지 환상이라야 해
지금부터 시작되는 시간들이 최상이 되어야지
아무것도 나는 가진 게 없다네 없다네
재능이나 사명 남겨줄 가치도 모른다네
그러면서 무엇인가 기다리고 

무엇인가 찾아서 헤맨다네
언제나 찾아오는 아침처럼 희망 하나 남아서....

아침이면 하나님은 한 장의 도화지를 주신다
얘야 이 도화지에 멋진 너의 여름을 그려보렴
사랑의 여름
영광의 여름
행복의 여름
그러나 도화지엔 무수한 암초만이 그려진 채 

소년의 여름이 구겨지고
청년의 여름이 실종되고 

그리고 여름은 또 시작된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본다
혼자 있을 수도 없고 

혼자 있지 않을 수도 없는 도시의 하늘
권태로움과 공포로 색칠된 도시의 하늘
오늘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창피하게 한다


떠나자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진실로 짐승이 되기 위해서
어딜 가니? 어딜 갈 거야?
옆에서 친구가 불안을 담고 묻는다
먼 곳을 가겠어 먼 곳을
이것 봐 그런 생각은 사춘기가 끝나면서 같이 끝나는 거야
아니야 사춘기란 끝나는 것이 아니야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희망이야
어떤 폐허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드는 희망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 

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그곳
그리움을 주고 활력을 주기도 하는 그곳
이 답답하고 숨 막히는 도시를 떠나서 

그런 먼 곳으로 가고 싶다
가자 사랑을 찾아서
가자 영광을 찾아서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인 파랑새를 찾아서

젊음이란 것은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네
사랑이란 것도 한순간의 허상이 아니라네
아름다운 꿈 하나 없으면 오늘을 견딜 수 없기에
우리들은 꿈을 그 꿈을 찾아 나선다네
기대 없는 사랑 그런 사랑 무엇에 소용인가
희망 없는 사랑 그건 역시 나에겐 소용없네
내가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주는 것만 옳다곤 않겠네
희망보다 항상 어려운 것은 체념이야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출발한다로 시작해서 먼 곳을 향해 떠난다
먼 데서 온 거라면 다 아름다워하는 형제들아 하고 보들레르는 말했지
그렇다, 먼 곳은 어디든 아름답다
먼 곳은 멀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먼 곳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보았던가
좁고 초라한 남자의 어깨
그 어깨에 짐처럼 얹힌 여자의 피곤한 잠
어디까지 가십니까?
배의 난간에서 낯선 남자는 묻는다
어디까지 가느냐고요?
이 배를 탈 그때부터 우리가 내릴 곳은 다 함께 정해져 있지 않았나요?
아! 그렇군요
낯선 사람으로 만나 공동의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 이건 대단한 발견인데요
그렇게 얘기하지 마십시오 힘없고 권태로운 얼굴로 그 권태로움을 겁내듯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당신과 공동의 운명이라니요
나는 지금 그것을 탈출하는 중인데요
낯선 사람은 계속 묻는다
탈출하면 무엇이 보일 것 같습니까?
무엇이든 보이겠죠, 무엇이든...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아닌 다른 무엇...
보일까요?
보이겠죠
곧 보일 거예요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해서 설명할 수 없는 그것
하지만 보이게 되면 기쁜 목소리로 얘기해 드리죠
바로 저것이라고...
배는 물살을 갈라 물방울을 만들고 

바다는 그 물방울을 다시 바다로 만든다
한낮의 태양은 우리의 살갗을 뜨겁게 태우고 

방향을 모르는 바람이 우리를 졸리게 한다

Sand Man Sand Man
Sand Man is coming
Sand Man is coming

서럽고 외로울 때면 모래를 뿌려 잠을 재우는 전설 속의 샌드맨
지금 이렇게 떠나가는 것이 슬픈 것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바다가 외로운 것인가
샌드맨은 다가와 모래를 뿌리고 

우리는 서러움과 외로움을 비켜선 오수에 빠져든다

나- 나-나-

마침내 우리는 지친 몸으로 돌아온다
먼 곳은 여전히 먼 곳에 있고 파랑새는 보이지 않는다
돌아오는 배의 난간에서 가져보는 잠깐 동안의 사랑
남자가 안은 팔의 힘 속에서 

여자가 속삭여주는 달콤한 어휘 속에서
우리는 잠깐잠깐 사랑에 잠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의 빈 가슴을 달래기 위한
숨겨진 울음의 몸짓일 뿐


어디까지 가십니까?
이제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모두 운명이 직결된 공동의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암초에 부딪쳤을 때 우리의 운명은 

언제나 하나로 직결돼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이 세상 어린이가 가지는 첫 번째 꿈
어린 시절 내게도 그런 꿈이 있었지
그때 나는 행복했었지
같은 꿈을 꾸면서 자랐는데
가는 길은 왜 달라졌나
아직도 그 골목엔 내가 두고 온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있을까

피곤한 남자의 어깨에 떨어져 있는 살비듬
서러운 여자의 어깨에 떨어져 있는 긴 머리카락 한 올
우리는 이것을 피해 떠났지만 결국 이것들과 만나고
이것들을 서로 털어주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공동의 운명임을...

우리는 우리가 찾아갔다가 

아무것도 보고 오지 못한 바다 저쪽을 다시 돌아본다
아... 구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저 먼 곳의 산 그림자
배가 멀어짐에 따라 그 산은 한 개의 피리어드로 변하고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는 바다로 사라진다
도시로 돌아온 우리의 가슴속에 

마지막 본 그 피리어드는 거대한 우주로
거대한 욕망으로 다시금 자리 잡는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낭랑한 물소리
작은 난로 위에 끓고 있는 보리차 물 주전자
햇볕이 가득한 마당에 눈부시게 널린 하얀 빨래
정답고 따뜻한 웃음 속에 나는 왜 눈물이 나나
언제라도 나는 변명 없이 살아가고 싶었네
언제라도 나는 후회 없이 떠나가고 싶었네
대문 밖을 나서는 남자의 가슴을 겨냥한 활시위
그렇더라도 나는 갈 수밖에 없네
신비한 저쪽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라-
변명 없이 살아가고 싶었네
후회 없이 떠나가고 싶었네
라-
후회 없이 떠나가고 싶었네
라-
언제라도 변명 없이 살아가고 싶었네
언제라도 나는 후회 없이 살아가고 싶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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