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는 모두 잊지 못할 자기만의 향기를 가진다.

정의 마음, 가랑비, 바람과 갈대, 나그네 바람(조용필 6집)

by whilelife



거리엔 실 같은 가랑비 촉촉이 내리고
발걸음 무거운 이 마음 달래주는 듯
오늘도 그렇게 가랑비 내리고 있었지.



묵직한 먹색 구름이 가득히, 머리 위를 버겁게 내리누르는 날. 뉴스는 장마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일요일까지 내내 이어졌다. 더위에 습기까지 가득하니, 집안에서도 여기저기 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혹여나 팬트리장에 있는 각종 식재료들은 괜찮은지 들었다 놓았다, 세탁 후 옷에서 냄새는 나지 않은 지 신경이 쓰인다. 장마는 그렇게 내 일상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러나 장마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처럼, 주말에 내리는 적당한 장맛비는 특히 그렇다. 낮게 내려앉은 무채색 구름이 주는 아늑함이 있다. 내리는 빗소리가 주는 운치가 있다. 집안에 앉아 한낮에도 어둑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향과 함께 하는 장마의 한 때는 여유롭다. 이런 날, 색소폰으로 첫 포문을 여는 조용필의 6집은 집안을 더욱 울림있께 채워준다.


흘러가는 저 구름은 정의 마음일까요
지나가는 저 바람도 정의 마음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마철에만 볼 수 있는 설렘 가득한 아이들의 모습이 있어서 좋다. 비 오는 날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두 아이 모두 코로 공기를 양껏 들이마시며, "습기 냄새! 정말 좋아!" 하며 어쩔 줄 몰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말하는 습기 냄새란 비오는 날 시멘트로 되어 있는 아파트나 상가 건물에서 맡을 수 있는 쿰쿰한 냄새다.


두 아이가 초등 저학년 부터였을까. 비오는 날, 일명 '습기 냄새'를 맡게 되면 아이들은 둘이 함께 '습기 냄새 좋다!' , '나도 좋다!' 하며 킁킁댔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처음 목격했을 때, 내 마음엔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별로 상쾌하지 않은 냄새를 좋아하고 있으니 건강에 해로울까봐 괜히 걱정도 되고, 어쩌다 '습기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는 지 이해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의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그저 묵묵히 지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얼마 전에야 풀 수 있었다. 이번 주말, 두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비가 내렸던 그날도 아파트엔 '습기 냄새'가 진동했고, 아이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십대에 들어서서 인지 서로 나누는 대화가 더 디테일해진 것이 달라졌다.


"와! 습기 냄새다!!"

"맞아! 우리가 좋아하는 습기 냄새다!"

"초등학교 때였지? 피아노 학원을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이 냄새가 났는데."

"맞아, 오빠. 그때 생각나서 참 좋다. 피아노 학원 그립다. 그때 선생님도 참 좋으셨는데."

"진짜, 나도 그때가 그립다."


두 아이는 이야기를 서로 이어받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내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미소가 지어졌다. 결국은 추억이었구나 싶었다. 특정 냄새는 그 냄새를 맡았던 순간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두 아이에게 습기 냄새는 초등학교 저학년, 피아노 학원의 추억이 스며있었다.


사실, 피아노 학원은 내가 고육책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들이 학교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안전하게 머물 곳이 필요했다. 두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피아노 학원으로 이동하여 수업을 들으면 내가 퇴근하여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3년을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피아노 학원과 습기 냄새는 어린 시절을 오롯이 함께한 소중한 추억이었나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내게도 어릴 때 매우 좋아했던 냄새가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습기 냄새'처럼 건강에는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냄새였는데, 그것은 바로 승합차의 매연 냄새였다.


여섯살 즈음, 동네 인근에서 꽤 큰 유치원을 다녔다. 노란색 유치원 버스는 동네를 빙빙 돌아 아이들을 태우고 커다란 건물 앞에 서곤 했다. 부모님과 떨어지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유치원 일정은 꽤 재미있었다. 노래 부르기, 율동하기, 만들기 등 프로그램이 꽤 다양했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순간은 역시 귀가의 순간이었다. 나는 승합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종종 승합차의 매연 냄새와 마주쳤다.


그랬다. 승합차의 매연 냄새는 집으로 간다는 신호였다. 그리하여 매연 냄새는 어느덧 내가 최고로 사랑하는 냄새가 되었다. 그 냄새가 얼마나 좋았는지, 나는 하원 줄을 서야하는 시각이 되면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 그리고 승합차 뒤쪽의 건물 벽에 기대 섰다. 승합차의 매연 냄새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 있으면, 유치원의 하원 풍경도 한눈에 들어왔다. 재잘거리며 승합차 곁으로 몰려드는 아이들과, 이를 단속하느라 바쁜 선생님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손마다 만들기 시간에 만든 작품을 조심히 들고 어서 집으로 가서 자랑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바람의 깊은 정을 그 누가 알고 있는지
갈대의 마음을 그 누가 알고 있을까
아 바람은 끝없이 불어옵니다
그러나 외로운 건 언제나 갈대랍니다


매연 냄새는 외로움의 냄새였다. 부모의 곁은 떠나 있으나 유치원의 일과도 끝났으니, 나는 잠시라도 어느 곳에도 매어 있지 않은 존재였다. 오롯이 홀로 존재하며 내가 자처한 내 몫의 외로움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의 냄새였다.


매연 냄새는 사색의 냄새였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잠깐 벗어나 나의 자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승합차 앞에 몰려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평소에는 그 속에 있을 나를 떠올려보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순간을 함께 하는 것이 매연 냄새였다.


매연 냄새는 노을의 냄새였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할 때면, 매연 냄새가 날 때 즈음 노을을 볼 수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산란했다. 꼭 어디에선가 느껴보았을 것만 같은 그런 슬프고도 마음 찡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노을은 조용필6집과 닮아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조용필 6집의 자켓 사진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 자연히 집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나는 매연 냄새를 느끼며 조용필의 6집 수록곡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흥얼거리곤 했다. 특히 '나그네 바람'은 노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하며 나 또한 먼 곳을 떠나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내가 매연 냄새를 사랑했던 까닭은, 외로움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의 품 안에서 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시간을 사랑했고, 어느덧 승합차의 매연, 노을, 외로움, 그리움, 조용필의 6집은 그렇게 내 안에서 하나의 경험으로 묶였다.



수많은 날들을 웃고 울고
다시 울고 다시 웃고
불어오는 님의 바람 막을 수가 없어
세월 가면 잊혀진다
세월 가면 잊혀진다
어느 누가 말했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서 매연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더 든 지금은 호흡기가 좋지 않아 버스의 매연은 더더욱 기피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지금도 버스의 매연 냄새를 우연히 맡는 순간이면 어느덧 나는 유치원에 다녔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매연 냄새는 지금도 내 영혼을 요람 위에 뉘이고 다정하게 흔든다. 유치원 생으로 돌아간 내 마음은 갑작스레 외롭고 그립고 노을이 보고싶어만 진다.


우리집 아이들이 습기 냄새를 사랑하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한 때문은 아닐까. 부모 없이 보내는 하루의 마지막 코스였던 피아노 학원, 아이들은 쿰쿰한 시멘트의 습기 내음을 맡으면 곧 하루 일과가 끝나고 엄마가 저희들을 데리러 오리라는 사실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남매가 서로를 의지하며 외로움과 고단함을 당당하게 견뎌냈던 시간들이었기에 뿌듯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을지.


매연 냄새와 습기 냄새는 모두 외로움과 그리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겨냈던 기억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단단하게 붙들어 주었던 용기의 기록이다. 결국은 매캐한 냄새든 쿰쿰한 냄새든, 그 안에서 성장의 기억을 퍼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악취가 아닌 나만의 향기가 되는 것이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기억이 아이들을 통해 퍼올려지는 순간, 풍요롭고 감사하다. 그리고 또 되돌아본다. 일상에서 느끼는 소중한 감각들을 얼마나 무심히 지나치며 살아왔는가를. 나의 이런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향기를 선물한다. 그 향기에 아름다운 의미를 입히자. 그리하면 우리 모두 잊지못할 자기만의 아름다운 향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조용필 6집

정의 마음

(작곡 조용필 / 작사 조용필 / 노래 조용필)



흘러가는 저 구름은 정의 마음일까요
지나가는 저 바람도 정의 마음일까요
우연한 만남 속에 가슴엔 꽃 피었고
짧았던 순간들을 슬픔으로 노래하네

쓴웃음 지우며 별을 보고 한숨을
돌아서는 모습에 주저앉아 눈물을
불러본다 외쳐본다 그냥 그렇게
이별의 인사도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저 하늘에 저 달빛은 정의 마음일까요
파도치는 저 물결도 정의 마음일까요
너와 나 만남 속에 사랑은 꽃 피었고
뜨거운 입김으로 슬픔을 노래하네

쓴웃음 지우며 별을 보고 한숨을
돌아서는 모습에 주저앉아 눈물을
불러본다 외쳐본다 그냥 그렇게
이별의 인사도 못한 채 그냥 그렇게




나그네 바람

(작곡 이호준 / 작사 하지영 / 노래 조용필)


그리움도 아쉬움도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뿌려놓고서
이슬 먹은 눈물 속에 사라져간 님아
소중했던 그 순간들 영원처럼 간직하고
나그네 바람 됐네

수많은 날들을 웃고 울고 다시 울고 다시 웃고
떠오르는 님의 얼굴 지울 수 없어
세월 가면 잊혀진다 세월 가면 잊혀진다
어느 누가 말했나

수많은 날들을 웃고 울고 다시 울고 다시 웃고
불어오는 님의 바람 막을 수가 없어
세월 가면 잊혀진다 세월 가면 잊혀진다
어느 누가 말했나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21화인간은 모두 그리움을 안고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