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앉아있던 대학 도서관을 나왔다. 오후 열 시에 가까운 시간, 귀소본능에 의해 자리를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온 터였다. 그러나 어쩐지 불 꺼진 하숙방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큰 시험을 앞둔 나조차 이런 마음인데 다른 이는 말할것도 없으리라. 대학 도서관은 거의 비어있는 듯 했다. 도서관 출입구 근처에 한참 서 있었는데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의 밤하늘만 쓸쓸한 먹빛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눈이 온대도 이상할 것 없는 11월 말, 서울의 추위 속에서 나는 한동안 서성였다.
나의 학교는 언덕배기라 부지가 높았다. 덕분에 도서관 출입구에 서서 보면 저만치 아래로 대학 번화가의 불빛이 보였다. 대학 정문에서 부터 빛나는 상가의 번쩍이는 화려한 불빛도,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주택가의 소박하고 따스한 불빛도, 모두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망연히 선 내 발걸음은 어디도 향하지 못했다.
문득 매서운 바람이 한바탕 도서관 주위를 휩쓸고 갔다. 몸이 떨렸다. 그런데 그 추위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존재가 나 말고도 또 있었다. 도서관 출입구 건너편에 저만치 서 있는 키 큰 느티나무였다.
가을의 끝자락에 선 느티나무 가지는 앙상했다. 가지 끝에 남아 있는 나뭇잎이라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무는 몇 남지 않은 깡마른 나뭇잎을 아슬아슬 매단 채 바람 속에 서 있었다. 바람은 야멸차게 불고, 느티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아까운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날려 보내고 있었다. 문득 내 처지를 잊고서 느티나무가 안쓰러워졌다. 서글펐다. 나뭇잎 한 장 한 장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나무는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 가지에서 떨어져 날아가는 나뭇잎도, 잎을 보내는 나무도, 그저 담담히 서로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말없는 이별의 현장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느티나무를 닮고 싶어졌다.내 마음에 알알이 맺힌 어떤 그리움, 어떤 슬픔, 어떤 쓸쓸함을 바람결에 모두 떨구어버리고 싶었다. 보내야 할 때는 보내주고 싶었다. 느티나무처럼, 그저 저렇게 바람결에 자연스럽게, 무덤덤하게, 투명한 저녁 하늘 속에 떠나보내고 싶었다.
나도 따라했다.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섰다. 내 손끝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실어 달아두었다. 그리고 바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이 여러 차례 나를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나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바람이 불수록, 내가 손끝으로 밀어냈던 감정들이 아우성치며 다시금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나는 느티나무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고 비참했다.
그렇게 나무를 닮으려 하던 날이 있었다. 담담히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이별할 줄 아는 나무의 용기를 닮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이십 대, 마음이 힘들었던 날들 중, 그 어느 하루였다.
그때의 그 느티나무는 언제까지고 내 마음에 곧게 서서 담담히 나뭇잎과 되풀이 작별하였다. 버리되 아파하지 않는 그 모습은, 버리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나와 사뭇 달라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벌써 십수년 전의 일이었다.
한순간 스쳐 가는, 그 세월이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주오
햇살 좋은 올해 5월이었다. 어느 주말, 나는 우연히 회화나무 한 그루와 마주쳤다.
회화나무를 만나려 일부러 길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교외의 작은 시골 마을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정말로 우연히 한옥으로 된 동사무소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호기심에 우연히 들어간 그곳 정원에서, 나이 많은 회화나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회화나무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 앞에 가 섰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운명인 듯 이끌렸다.
나무는 성인 세 명이 두 팔을 활짝 벌려 안아야 할 만큼 그 줄기가 굵었다. 굵은 줄기는 나무의 수령이 꽤 되었음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도 회화나무는 힘에 부치는 기색 없이, 가지마다 울창하게 잎을 돋우어 내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오랜 시간을 통과하느라 더욱 생생한 그 생명력 앞에 서서, 나무의 시간 속에 침잠해 들어갔다. 나무는 시간으로 분절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저 이곳에 함께 공존하는 듯 보였다. 과거의 누군가가 두고 간 웃음과한숨과 눈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망연히 푸른 잎새를 올려다보노라니, 문득 무성한 잎 사이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십수년 전 도서관 출입구 앞에 서 있었던 이십 대의 나였다. 늦가을, 나뭇잎을 떨구던 느티나무도 있었다. 나는, 어쩌지 못할 마음의 통증을 견디며 서 있었고, 느티나무는 바람에 잎새를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마음에 떠오른 풍경을 본 순간,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느티나무는 나뭇잎을 담담히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조차 사랑이었다. 또한 혼자라고 생각하며 웅크렸던 이십대의 내 뒷모습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날 지키던 커다란 사랑이 있었다. 내가 돌아봐주길 기대하지도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랬었다. 生은 단 한 번도 나에게 등을 돌린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때에도 있었고, 지금에도 존재하고 있는 生을 기르는 사랑. 그것은 항상 나를 향해 있었다.
헤매더라도 결국엔 도달할 수밖에 없는 길. 그 길은 사랑이었다. 힘들게만 느껴졌던 순간들도 결국은 사랑이 가득한 길 한복판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면,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사랑 속에 있으리라. 지금 걷고 있는 행보가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결국 그 길은 사랑 위에 있으리라.
사랑 위를 걷고 사랑을 숨 쉬고 사랑과 함께 머무는 것이 우리의 삶이리라.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리는 사랑인 것이다.
5월의 봄바람에 싱그러운 잎새를 풍요롭게 내맡긴 채 당당히 서 있는 회화나무를 보고 또 보았다.
긴 세월 이 자리를 사랑으로 지켜온 존재 앞에서 한없이 숙연해진 나는,
무한한 사랑 속에서 자의식조차 사라진 채 한없이 편안해진 나는,
아주 오랫동안, 회화나무 앞에 서 있었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 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 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 한순간 스쳐가는 그 세월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주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은 영원히 남아, 언제나 내 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