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조용필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9집)

by whilelife


대학을 조기졸업했다. 취직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느라고 하루 종일 앉아있던 대학 도서관을 나왔다. 오후 열 시에 가까운 시간, 귀소본능에 의해 자리를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온 터. 그러나 어쩐지 불 꺼진 하숙방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큰 시험을 앞둔 나조차 이런 마음인데 다른 이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나올 때 보니, 대학 도서관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도서관 출구 앞에 서서 한참 서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조차 한 명 없었다. 사람이 그리웠지만, 서울의 밤하늘만 쓸쓸한 먹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눈이 온대도 이상할 것 없는 11월 말, 내게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서울의 추위 속에서 나는 갈 곳을 모르고 서성였다.


눈을 들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학교는 언덕배기라 부지가 높았다. 덕분에 도서관 출입구에 서서 보면 저만치 아래로 대학 번화가의 불빛이 보였다. 대학 정문에서부터 빛나는 상가의 번쩍이는 화려한 불빛도,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주택가의 소박하고 따스한 불빛도, 모두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망연히 선 내 발걸음은 어디도 향하지 못했다. 저 많은 불빛들 중에서 날 품어줄 빛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사무쳤다.


문득 매서운 바람이 한바탕 도서관 주위를 휩쓸고 갔다. 으스스 몸이 떨렸다. 바람소리에 '으스스' 소리가 진짜로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 추위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존재가 나 말고도 또 있었다. 도서관 출입구 건너편에 서 있던 키 큰 느티나무였다.


가을의 끝자락에 선 느티나무 가지는 앙상했다. 가지 끝에 남아 있는 나뭇잎이라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무는 몇 남지 않은 깡마른 나뭇잎을 아슬아슬 매단 채 바람 속에 서 있었다. 바람은 야멸차게 불고, 티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아까운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날려 보내고 있었다. 문득 내 처지를 잊고서 느티나무가 안쓰러워졌다. 서글펐다. 나뭇잎 한 장 한 장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나무는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

날아가는 나뭇잎도, 잎을 보내는 나무도,

그저 담담히 서로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말없는 이별의 현장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였다. 느티나무를 닮고 싶어졌다. 내 마음에 알알이 맺힌 어떤 그리움, 어떤 슬픔, 어떤 쓸쓸함을 바람결에 모두 떨구어버리고 싶었다. 보내야 할 때는 보내주고 싶었다. 느티나무처럼, 그저 저렇게 바람결에 자연스럽게, 무덤덤하게, 투명한 저녁 하늘 속에 떠나보내고 싶었다.


나도 따라 했다.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섰다. 내 손끝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실어 달아 두었다. 그리고 바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이 여러 차례 나를 휩쓸고 지나 뒤에도 나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바람이 불수록, 내가 손끝으로 밀어냈던 감정들이 아우성치며 다시금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나는 느티나무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고 비참했다.


그렇게 나무를 닮으려 애썼던 나의 어느 하루는 무위로 돌아갔다. 담담히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이별할 줄 아는 나무의 용기를 닮고 싶었으나 이십 대의 나는 따라 할 수 없었다. 나무처럼 추위를 잘도 견디면 좋으련만, 나무를 따라 하면 따라 할수록 나의 육체는 추위에 얼어붙어 온몸이 뻐근하여 왔다. 서성이던 나는 어쩔 수 없이 하숙집으로 향했다.


그때의 그 느티나무는 언제까지고 내 마음에 곧게 서서 담담히 나뭇잎과 되풀이 작별하였다.

버리되 아파하지 않는 그 모습은, 버리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나와 사뭇 달라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한순간 스쳐 가는, 그 세월이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주오





햇살 좋은 올해 5월이었다. 어느 주말, 나는 우연히 회화나무 한 그루와 마주쳤다.


회화나무를 만나려 일부러 길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교외의 작은 시골 마을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정말로 우연히 한옥으로 된 동사무소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호기심에 우. 연. 히 들어간 그곳 정원에서, 나이 많은 회화나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회화나무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 앞에 가 섰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운명인 듯 이끌렸다.


나무는 성인 세 명이 두 팔을 활짝 벌려 안아야 할 만큼 그 줄기가 굵었다. 굵은 줄기는 나무의 수령이 꽤 되었음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도 회화나무는 힘에 부치는 기색 없이, 가지마다 울창하게 잎을 돋우어 내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랜 시간을 통과하느라 더욱 생생한 그 생명력 앞에 서서, 나는 나무의 시간 속에 침잠해 들어갔다. 나무는 시간으로 분절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저 이곳에 함께 공존하는 듯 보였다. 과거의 누군가가 두고 간 웃음과 한숨과 눈물이 모두 공존의 형태로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망연히 푸른 잎새를 올려다보노라니, 문득 성한 잎 사이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십수 년 전 도서관 출입구 앞에 서 있었던 이십 대의 나였다. 늦가을, 나뭇잎을 떨구던 느티나무도 있었다. 나는, 어쩌지 못할 마음의 통증을 견디며 서 있었고, 느티나무는 바람에 잎새를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마음에 떠오른 풍경을 본 순간, 나는 그제야 게 되었다. 느티나무는 나뭇잎을 담담히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조차 사랑이었다. 또한 혼자라고 생각하며 웅크렸던 이십 대의 내 뒷모습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날 지키던 다란 사랑이 있었다. 내가 돌아봐주길 기대하지도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서 핸드폰을 켰다. 주변에 마침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리웁도록 듣고 싶었던 노래 한 곡을 플레이했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랬었다. 生은 단 한 번도 나에게 등을 돌린 적이 없었다. 내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지는 곳에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그저 내가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에도 있었고, 지금에도 존재하고 있는 生을 기르는 사랑. 그것은 항상 나를 향해 있었다.


헤매더라도 결국엔 도달할 수밖에 없는 길. 그 길은 사랑이었다. 힘들게만 느껴졌던 순간들도 결국은 사랑이 가득한 길 한복판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면,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사랑 속에 있으리라. 지금 걷고 있는 행보가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결국 그 길은 사랑 위에 있으리라.


사랑 위를 걷고 사랑을 숨 쉬고 사랑과 함께 머무는 것이 우리의 삶이리라.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리는, 사랑인 것이다.


5월의 봄바람에 싱그러운 잎새를 풍요롭게 내맡긴 채 당당히 서 있는 회화나무를 보고 또 보았다. 사랑이 항상 곁에 있다는 말을 믿지 못했던 20대를 어찌어찌 통과해 내자, 수십 년 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는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조용필의 노래 가사가 이제는 가슴에 사무치도록 파고들었다.


긴 세월 이 자리를 사랑으로 지켜온 존재 앞에서 한없이 숙연해진 나는,

무한한 사랑 속에서 한없이 편안해진 나는,

아주 오랫동안, 회화나무 앞에 서 있었다.


닮으려 애쓰지 않아도 어느 순간 닮아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성장이리라.


오랜 세월 들어온

조용필의 노래를 닮아가는 나.

사랑을 깨달아가는 나, 참으로 뿌듯하고 기특하다.


"너, 참 살아있길 잘했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
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 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
한순간 스쳐가는 그 세월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주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은 영원히 남아, 언제나 내 곁에.



조용필,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9집) 듣기(출처 - 조용필 공식 유튜브 채널)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작곡 이호준 / 작사 하지영 / 편곡 조용필>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대 긴 밤을 지새운 별처럼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


아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
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
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


한순간 스쳐가는 그 세월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주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은 영원히 남아
언제나 내 곁에


아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
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
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


한순간 스쳐가는 그 세월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주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은 영원히 남아
언제나 내 곁에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대 긴 밤을 지샌 별처럼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






keyword
이전 04화보통의 날들에 보내는 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