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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May 13. 2024

사랑하기 때문에

조용필, 사랑하기 때문에(7집,30주년 기념앨범) / 작은 천국(17집)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하늘 맑고 햇살 밝아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오늘과 같은 날, 다시 만날 수 없는 행운처럼 반짝이는 이 순간을 기리고파 당신께 편지를 띄웁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날씨가 좋았지요.


그즈음, 나는 깊은 방황 속에 있었습니다. 사실은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시작된 나의 방황은 대학에 들어가서 더욱더 심해졌습니다. 대학교를 다니고는 있었지만 내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도대체 어디에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의 부족한 학식과 능력을 돈으로 바꾸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나에 대한 의심과 자괴감만 가득하여 그저 무력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나는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좋아하던 독서도, 일기 쓰기도 대학에 들어가서는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대학 수업이 있는 날에도 나는 한낮까지 늘어지게 낮잠을 잤지요. 사실, 대부분은 자는 척을 했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것이 내게 가장 나은 선택인 듯 보였으니까요.


누워서 누워서 시간을 보내다 허리가 심하게 아파올 때가 되어야 겨우 몸을 일으켜 대충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등록금 대시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그래도 학교를 가는 모습 정도는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등교하는 늦은 오후엔 대부분 수업이 끝나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냥 갔습니다. 운 좋으면 수업 끝자락이나마 듣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캠퍼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습니다.


과방은 낯설고 도서관에 가도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매점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다 홀로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캠퍼스 벤치 아무 곳에나 앉습니다.


나와는 다른 활력 넘치는 대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 그저 그들이 부럽고, 내가 싫어지곤 했습니다. '나'를 벗어던지고 웃고 있는 '저들'이 되고 싶어 져 괴로웠어요.


과연 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있을까? 나를 써주는 곳이 있긴 있을까? 하늘은 여느 때처럼 평온하고 노을은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나는 더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내 마음에 일어나는 전쟁을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홀로 감당하고 홀로 버텨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 도망치고만 싶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럴 즈음이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연락을 준 것은요.


"나, 너 보러 가도 될까?"


제가 모든 일을 작파하고 그나마 했던 활동이 인터넷 동호회였죠. 대학교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나에게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를 만들어준 동호회였습니다. 나의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였던 당신이 내게 이렇게 제안했지요.  


나는 사실 망설여졌습니다. 종종 채팅이나 게시판 댓글로 만나던 당신이 내가 사는 곳으로 놀러 온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이 앞섰습니다. 사는 지역이 달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 나를 찾아온다니, 사실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나는 학교와 집만 오가는지라 내가 사는 지역을 거의 알지 못했어요. 이 지역에 처음 오는 누군가에게 맛집이며 명소를 소개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안한 그날은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그냥 그러마 했습니다. 사실, 약속 따위 만들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거의 매일 할 일이 없었지만요.


시간이 조금씩 흘렀습니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두려움이 올라왔습니다. 두려움은 나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며 학교의 중간, 기말 고사도 보러 가지 않는 은둔 생활자.


고등학교 친구들의 연락은 회피하고 대학교에서는 새 친구를 사귀지 못했으니 친구라는 존재를 오래간만에 대면하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어떻게 행동해야 우울해 보이지 않을지 걱정되었습니다. 나와는 달리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당신에게 내 엉망인 모습을 들킬까 봐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친구란 '여학생'뿐이었던 내가 과연 '남자 사람'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도 잘 모를 일이었지요.


약속한 당일이 되었습니다. 약속시간 한 시간 전에 눈이 떠졌습니다. 이대로 준비해서 나가면 당신과 약속한 시간 대로, 기차역에 당신을 딱 맞춤하게 마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께 미안하게도 나는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네, 일부러 다시 잠을 자려고 애썼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잠 속으로 숨어 들어가려 애썼습니다.


다시 잠에서 깨고 보니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먼 곳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그제야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핸드폰으로 통화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중 온다는 사람이 늦으면 전화를 할 법도 한 데, 당신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단 한통도 없었습니다. 부재중 전화가 없는 것을 보고 갑자기 더욱 걱정이 되었습니다.


'혹시 오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너무 화가 나서 전화를 안 하는 것일까?'


당신 앞에 나설 용기는 여전히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랜 시간 기다릴까 봐 걱정도 되었습니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한참 고민했습니다. 내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고, 내가 먼저 전화를 걸 염치는 더욱더 나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오지 않은 것이라면 오히려 홀가분할 것이고, 만약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면 직접 얼굴을 보고 사과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빨리 가기 위해 택시까지 잡아타 기차역까지 달렸지요.


도착한 기차역 역사는 기차 도착시간이 아니었던 지라 한산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와 약속한 그 친구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두서너 명의 노인 분들 외에 젊은 사람이란 그곳에 당신뿐이었으니까요.


그 텅 빈 대합실에, 입구를 향해 등을 돌린 채로 커다란 백팩을 메고 앉아있는 남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꼿꼿하고 차분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요.


당신에게 다가가기 전에 다시 한번 핸드폰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시간은 벌써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고, 당신은 그 사이에도 내게 전화 한 통 걸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묵묵하게, 당신은 그런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어떻게 된 걸까. 뭘 믿고 전화 한 통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세상 모든 것이 의심투성이었던 나에게, 당신의 행동은 전혀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의 뒷모습이 너무나 의연하여 더욱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문득 눈물이 났습니다. 결국은 나의 힘듦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등뒤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당신이 뒤돌아 보았지요. 나를 발견한 당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그 순간 긴장된 마음으로 당신을 살폈습니다. 당연히 나의 지각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지각의 이유를 듣기 위해 날 질책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화를 낼 것이라는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당신은 내게 일말의 원망이나 서운함이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습니다. 그 투명한 표정에 나는 한 번 더 놀랐습니다. 왜 늦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단 한마디의 불평과 푸념 없이, 당신은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 예상과 다른 당신을 보고서 나는 그동안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긴장했던 것인지 허탈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 당신께 감사했어요.


그렇게 당신과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택시를 잡아 타고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도시의 명소(?)였던 시내로 향했었지요.


당신은 말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내게 예의를 최대한 갖추어주었어요. 말투는 부드러웠고 편안했습니다. '낯선 남자 사람 친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보잘것없는 시내의 거리와 거리를 같이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매일 치열하게 동굴만 파던 내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기차역으로 돌아가 당신을 배웅하고 오면서, 나는 당신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나는, 나의 존재를 의심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내게 주어진 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도망치 치려고만 했습니다.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바라는 헛된 망상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약속 시간에 두 시간이나 늦은 내게 원망의 말을 쏟아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원망할 대상이 분명히 있는데도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지 않고 의연하게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나와 같은 나이였는데도, 당신은 긍정적이고 강인한 모습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의심과 원망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더 이상 전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이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동굴을 파는 일상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많음을 그날 하루 몸소 보여주었던 이가 바로 당신이었지요.


당신을 통해, 나의 우울함과 나약함은 습관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습관이라면, 고칠 수 있는 것이라는 용기도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얼마 후 나는 재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있는 곳이 앞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다시 길을 찾아야겠다 마음먹었거든요. 그러나 길이 바로 찾아지지는 않았습니다. 학과 선택도 우왕좌왕, 공부도 내 마음 가는 대로 하다 보니 입시에만 두 번을 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내가 진정 바라는 길이 무엇인지 발견해 낼 수 있었지요.


'귀인'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당신이 내게 귀인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거의 연락이 없다가도 당신은 가끔 먼저 연락을 했지요. 따뜻한 밥 한 끼 사주겠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우연치고는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가장 힘들때  당신의 연락이 선물처럼 당도했었습니다. 반년에 한 번 볼까하였는데도 쩌면 타이밍이 그리 잘 맞았더랬는지요.


그리하여 당신의 따뜻한 밥 한 끼와 산책 한바퀴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요.  당신은 10년 가까이 이렇게 나를 지지해 주는 소중하고도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였습니다.


방황은 어쩌면 귀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의례일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깊은 방황을 겪지 않았다면, 당신이라는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없었겠지요. 나는 나의 귀인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저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때 겪은 방황의 시간마저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방황의 종지부에 당신이 있어 더욱 감사합니다. 이제는 나의 반쪽이신 당신, 당신이라는 귀인이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가장 큰 행운이고 삶의 축복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보낸 뒤 매일 따듯한 저녁 식사로 서로의 온기를 지켜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과 만들어 나가는 '작은 천국'이 있어 오늘도 힘을 냅니다.



때로는 거친 바람이
우릴 변하게 하지만
함께한 마음 있으니
영원할 수 있어
그대가 지쳐 힘들 때
한 걸음 앞에 나와봐
우리가 찾았던 행복이
숨 쉬는 이곳에



조용필, <사랑하기 때문에> 듣기(30주년 기념 앨범, YPC공식 유튜브)


조용필, <작은 천국> 듣기(17집, YPC공식 유튜브)



<사랑하기 때문에>


조용필 30주년 기념앨범

작곡 유재하 / 작사 유재하 / 노래 조용필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어제는 떠나간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젠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께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나간 그대를

잊지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젠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께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작은 천국>


작곡 조용필 / 작사 이애경 / 노래 조용필


조용필 17집

그리운 모습 보고픈 얼굴

모두 함께 여기에 있네 작은 천국에

미소를 담은 그 눈빛으로

지금 이순간 우리의 사랑 더할 수 있게


삶에 부딪혀 서글플 때면 이걸 기억해봐

행복은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있다고

때로는 거친 바람이 우릴 변하게 하지만

함께한 마음 있으니 영원할 수 있어

그대가 지쳐 힘들 때 한 걸음 앞에 나와봐

우리가 찾았던 행복이 숨쉬는 이곳에


지금 이순간 우리의 사랑 더할 수 있게

삶에 부딪혀 서글플 때면 이걸 기억해봐

행복은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있다고

때로는 거친 바람이 우릴 변하게 하지만

함께한 마음 있으니 영원할 수 있어


그대가 지쳐 힘들 때 한 걸음 앞에 나와봐

우리가 찾았던 행복이 숨쉬는 이곳에

그리운 모습 보고픈 얼굴

모두 함께 여기에 있네

작은 천국에


이전 14화 우리 함께 꽃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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