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겨울이었다. 한가로운 주말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아빠는 거실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고, 그 순간이 내게는 기회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빠 앞에 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수없이 홀로 연습했던 한 마디를내뱉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렇게 안달을 낸 것은 며칠 전에 우연히 들은 라디오 광고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듣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 광고에서 내가 사는 지역에 '조용필 콘서트'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앨범 한 장을 살 때도 지갑 속 돈을 그러모아야 했던 학생 신분이었기에, 그보다 훨씬 비싼 콘서트 티켓을 자력으로 구매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아빠께 손을 내밀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아빠가 무서운 분이어서, 콘서트에 간다는 것을 이해 못 하실 분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성격상 말수가 거의 없었던 분이었지만, 어린 나를 항상 당신께서 가시는 곳마다 손잡고 다니시며 함께 하셨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주려 애쓰셨다. 그 때문에 내게 아빠는 한없이 너그러운, 그리하여 언제나 내편인 분이셨다.
그래도, 사춘기가 지나면서 조금쯤 서먹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초등 고학년이 된 즈음, 아빠의 약속장소에 따라가기에는 민망한 나이가 되고 보니 자연스레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었다. 중학교로 진학하면서부터는 아빠와 공유할 수 있는 일들도 적어졌다.
게다가 나 또한 아빠를 닮아 말수가 거의 없고 애교도 없었기에, 아빠께 살가운 말 한마디 먼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주말에 가끔 아빠와 시간을 보낼 때에도 우리는 침묵의 부녀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없이 지내다 불쑥 콘서트 이야기를 꺼내자니, 아쉬울 때만 손 내미는 얌체 같아 민망해기는 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빠는 여전히 너그러우신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빠는 우리 집에서 조용필 원조 팬이셨기에 내 마음을 이해하시리라 믿었다.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빠께 콘서트 티켓을 사달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도 어렵게 느껴졌던 것은 우리 집의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당시는 초유의 국가적 사태라는 'IMF'가 지나간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때였고, 우리 집도 여전히 그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눈치껏집안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콘서트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철없는 행동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생활비조차 걱정해야 할 시점에 조용필 콘서트를 보고 싶다고 조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철부지 아이의 욕심이었다.
그러나, 18년 동안 앨범으로만 들어왔던 조용필의 음악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언제 다시 조용필의 콘서트를 내가 사는 곳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집안 사정을 고려하여 스스로 여러 번 포기하려 마음먹었다가도, 조용필의 앨범을 들으면 욕심이 솟으며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그래, 이번 한 번만!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어보자!'
나는 그렇게 많은 고민 끝에, 홀로 되뇌었던 그 말을 내뱉고 말았던 것이었다. 신문을 보고 있던 아빠가 눈을 들었다. 나의 얼굴을 살피는 아빠의 눈빛은 잠깐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아빠의 대답은 어떨까. 나는 긴장하며 아빠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래, 아빠가 한 번 구해보마."
나의 요구를 철없다고 나무라지 않고 단번에 콘서트 티켓을 구해다 주신다니! 생각지도 못한 선선한 허락에 나는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콘서트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뒤, 그제야 나는 아빠도 콘서트에 가실지 궁금해졌다. 아빠도 조용필 팬이시니, 콘서트에 가고 싶으신 마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아빠도 같이 가시는 거예요? 아빠도 오랜 팬이시잖아요."
아빠와 함께 콘서트를 보게 될 상상을 하니 더욱더 기뻤다. 그러나 아빠는 조금 머뭇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쎄, 나는......, 콘서트는 생소해서... 티켓은 한 장만 구할 테니 너만 보고 와라."
물론 아빠가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많아 전보다 음악을 덜 듣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말만 그리 하셨을 뿐, 결국 티켓은 두 장이 될 거라고 나는 그리 여겼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 티켓을 사주시려 하는 것일 테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빠는 조용필 팬이었으니까, 아빠도 결국은 티켓을 한 장 더 구매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콘서트 당일은 매우 추웠다. 아빠는 날이 춥다며 콘서트가 열리는 예술회관까지 나를 태워다 주시고는, 외투의 속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셨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꺼내 든 티켓은 정말로 단 한 장뿐이었다.내 손에 들린 단 한 장의 티켓 앞에서 나는 망연했다. 미안함과 슬픔과 기쁨이 한순간에엄습하여 혼란스러웠다.
"뭐 해. 어서 들어가. 곧 시작하겠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다녀오겠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꾸만 재촉하는 아빠께, 나는 목례만 꾸벅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콘서트 장을 향했다. 둘셋씩 짝지어 들어가는 사람들 틈을 홀로 비집고 들어가며 어쩐 일인지 가슴에 통증이 이는 듯 해 한숨을 내리 쉬었다. 아빠와 멀어진 거리만큼, 겨울바람도 더욱 거세게 불어 웅웅 소음도 심하였다.
내 눈으로 생생히 바라보는, 나의 첫 콘서트 관람이었지만 마냥 들뜰 수 없었다. 정해진 좌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홀로 찾아온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자꾸만 아빠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아빠도 함께 왔다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나는 어쩌자고 이리도 철없는 행동을 하여 아빠를 더 힘들게 했는지. 스스로 한심해하며 자책하였다.
그러나, 막상 콘서트가 시작되자 나는 순식간에 몰입했다. 두 시간 넘는 콘서트는 매우 짧게만 느껴졌다. 1집부터 당시 가장 최신곡이었던 15집의 앨범까지, 18년 동안을 수없이 반복해서 들은 나였다. 앨범으로만 듣던 음악들이 내 눈앞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니 신기하여 어쩔 줄 몰랐다. 노래 한 곡 한 곡이 바뀔 때마다 울고 웃으며, 한 곡도 빠짐없이 노래를 따라 부르느라 아빠에 대한 미안함은 그렇게 잊혔다.
콘서트가 끝난 뒤에도, 나는 아쉬운 마음에 콘서트 장을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텅 빈 무대를 바라보다가, 로비를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겨우 예술회관의 입구를 나섰다. 콘서트를 관람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빠져나간 듯, 회관 앞 광장은 황량하고 스산했다. 매서운 겨울바람만 그 텅 빈 공간을 굉음을 내며 메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파로 가득했던 그곳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제야 콘서트를 보지 못하고 집으로되돌아가신 아빠가 생각이 났다. 겨울바람도 내 두 뺨을 시리게 할퀴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꽤나 멀었다. 나는 문득 모든 것이 서러워져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서둘러 걸었다. 그런 내 발걸음 앞에, 문득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 아빠?"
"콘서트 끝나면 데리고 가려고, 근처에서 좀 있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빠의 모습은 피곤한 듯했지만 여전히 평온하고 너그러웠다. 날은 춥고, 콘서트는 언제 끝날 지 정확히 알 수 없고. 홀로 시간을 어림하며 이 근처를 서성였을 아빠. 여러 사람들 틈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내 모습을 찾았을 아빠, 노심초사 날 기다리셨을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당신은 정작 콘서트도 보지 못하고, 추위에 떨며, 지루하게 기다리며,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시려니 그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그런데도 아빠는 별 내색 없이 이 모두를 자처하시고 계셨다.
말을 마친 아빠는 벌써 등을 돌려 저만치 걸어가고 계셨다. 나도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사춘기 이후, 아빠와의 거리감을 느끼며 나는 가끔 홀로 생각했다. 아빠는 여전히 너그럽지만, 어릴 때만큼 날 사랑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아빠의 등 뒤를 따라 걸어가던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아무 근거 없이 아빠의 사랑을 그렇게 깎아내린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내 마음 편하고자 아빠의 마음을 제멋대로 가늠하였음을 깨달았다.아빠는 지금까지도 알지 못하신다. 그 순간, 내가 아빠의 등 뒤에서 눈물을 삼켰음을.
나 그대만을 위해서 피어난 저 바위틈에 한송이 들꽃이여 돌틈사이 이름도 없는 들꽃처럼 핀다 해도 내 진정 그대를 위해서 살아 가리라
그러나, 아빠가 나를 위해 흘린 눈물은 또 얼마나 많았으랴. 그 눈물은 모두 소리 없이 속으로 흘렀으리라. 그 속으로 삼킨 눈물은 아빠의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씨앗이 되고 새싹이 되어 들꽃을 피워냈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날, 나보다 앞서 걷는 아버지의 등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수많은 들꽃을 보았다. 아무도 바라보아주지 않고, 자식마저 알아주지 않는 그 사랑을. 그러면서도 나를 향해 여전히 피어있는 그 들꽃을 말이다.
그대는 내 가슴에 항상 머물고, 수많은 꽃 중에 들꽃이 되어도 행복하리
꽃집에 진열된 꽃은 주목을 받는다. 심지어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돈을 지불한다. 그러나 길가에 핀 작은 들꽃은 사람들의 눈길 받기도 어렵다. 부모의 사랑은 들꽃과 같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리 해야 만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을 주는 일생을 살아내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바로 그분들의 삶이다.
나 또한 이제는 부모가 되었는데도, 나의 부모님만큼의 사랑이 내 안에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손자들이 생긴 뒤에는 더욱더 커지는 나의 부모님의 사랑을, 아무리 애써도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지금은 한창 봄, 꽃이 피는 계절, 조금만 눈을 돌리면 자리자리마다 꽃이다. 예전엔 그 자리에 꽃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나. 화원 속에 있는 커다란 장미만 예쁜 줄 알았던 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는 나도 화원에 핀 화려한 꽃보다는 길가에 핀 들꽃을 더욱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함이 아주 조금쯤 생겼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 가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들꽃이 피어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만히 다가간다. 작고 작은 들꽃이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 한참을 들여다본다. 들꽃을 보면 표현하지 못할 사랑으로 가득했던 그때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들꽃 속에 아빠의 마음이 있다. 아빠의 마음이 들꽃으로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