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 바람이 전하는 말(8집/조용필 30주년 기념 앨범)
택시를 탔다.
운전을 못하는 나는 퇴근길에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그날따라 버스를 놓쳤다. 다음 버스 때까지 20분을 거리에 서 있어야 할 판이었다. 때는 9월 말, 한창 더위는 뒤로 물러나고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는 달이었다. 9월의 선선한 바람이 참으로 반가웠으나, 몸이 너무 지쳐있었다. 한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낸 터였다. 이렇게 까지 하여 직장을 다니며 살아야 하는가, 회의감으로 내 마음도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모두 힘든 상태로, 길 위에서 20분을 서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버스도, 버스 운전기사도, 출근길에 늦게 나선 나도 다 미웠다. 인도의 타일 바닥 위에 쓰러져 팔다리를 버둥대며 어린아이처럼 짜증을 부리고 싶었다. 내가 택시를 잡아 탔던 그날은 바로 그런 날이었다.
택시는 순조롭게 잡혔다. 내가 차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택시는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어 섰다. 나는 이참에 아까 거리에서 만났던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차창을 내렸다. 차창을 여는 순간, 청량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내 얼굴 위로 춤을 춘다.
내 시야를 가리던 머리카락을 훔쳐 묶었다. 그러자 문득 인도 가로수 곁에 수줍게 피어있는 작은 생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 모를 작디작은 가을꽃이 바람 따라 어깨춤을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고서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듯했다. 하늘을 닮은 파란색 꽃임이 햇살에 반짝였다. 바람에 색을 입힌다면, 바로 저 꽃과 같은 색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노래 가사 하나가 내 머릿속을 관통한다.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 놓으리.
그렇다. 조용필의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래 가사 중 일부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가사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다. 작은 꽃들은 내 흥얼거림이 시작되자 파란 꽃잎 사귀를 일렁이며 한층 즐거워했다. 꽃을 바라보며 노래 가사를 생각하니, 내 가슴에 맑고도 파아란 물이 서서히 스며드는 듯했다.
상쾌하고 아름다운 것, 빛인지 향기인지 모를 실체 없는 그 무엇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눈부시고도 따뜻한 기운이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티 없이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늘진 곳에서 추위에 떨다 쨍하게 떠오른 태양 빛에 몸을 녹이는 듯했다.
그것은 기실,
노래 가사를 따라 내 머릿속에 그려진 여러 그림들 때문이었다.
그 장면 속에는
나를 사랑하는 신(神)의 손 하나가
나의 미소를 바라며
내가 지나가는 자리에
심을 꽃을 창조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내가 지나는 자리를 미리 알고
일부러 나에게만 보이는 작은 꽃을 심어
위로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렇게 내가 힘든 날이 있을 줄을 알고,
선율을 만들고 가사를 붙여
정성껏 노래하는 가왕의 모습도 있었다.
모두 귀하고 소중한,
나만을 위한 사랑이었다.
울컥했다.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이 이런 것이라니, 나는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 겨우 몇 가지 일에 지쳤다고 하여 삶을 비관할 텐가.
이제, 신호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려는 그때, 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지나 이쪽 편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출발하려던 택시는 멈칫하더니 노인의 발걸음을 기다려주었다. 노인은 매우 힘겹게 한 발 한 발을 지면에서 떼내어 나아가고 있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 육체의 불편함이 내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노인의 모습이 이제 더 이상 남일 같지 않은 것은, 내 생체시계도 '젊음'보다는 '늙음'쪽으로 기울어져있기 때문일까. 노인의 고통 속에서 온 인류의 '늙음'에 대하여 상심스런 생각이 드는 것은, 이제 나도 조금쯤 연민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노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오늘 힘든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를 힘든 마음으로 살지 않아도 누구나 그 끝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인의 천천한 걸음이 인도에 닿자, 택시는 출발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돌려 멀어져 가는 꽃들과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차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의미 없이 느껴질 때에야 돌아앉아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조용필의 <바람이 전하는 말>을 찾아 내 귓가에 들려주었다.
오늘을 사는 나를 위해 위로를 건네며. 방금 보았던 꽃들을 내 마음속에 그리며,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며. <바람이 전하는 말>은, 조용필의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간 이들이 내게 전하는 위로와 사랑이었다.
그렇다. 나라는 존재가 지금을 사는 것은 내게 전달된 많은 이들의 사랑 때문이다. 내 안에 켜켜이 담긴 많은 이들의 사랑이, 사랑받았던 나의 기억이, 이대로 흩어진다 생각하면 너무나 아까운 것이리라. 인생의 끝의 끝에서도 바람이 되어서라도 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먼 훗날,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그 자리를 찾아 꽃을 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금방 고개를 저었다. 먼 훗날이 아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보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꽃을 심듯 글을 쓴다. 한 글자 한 글자 속에 사랑을 심어 당신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두어본다. 그렇게 오늘도 살아갈 힘을 얻어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바람이전하는 말(작곡 김희갑 / 작사 양인자 / 노래 조용필)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 갔느니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소리라 생각하지 마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 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 나면 낙엽의 연기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