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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Jan 14. 2024

꽃을 심듯 글을 쓴다.

조용필 - 바람이 전하는 말(8집/조용필 30주년 기념 앨범)

택시를 탔다. 운전을 못하는 나는 퇴근길에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그날따라 버스를 놓쳐 20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는 이제 갓 여름을 난 9월 말, 한창 더위는 뒤로 물러나고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는 계절. 찬 계절에 태어나서인지, 여름더위 나기를 유독 어려워하는 나는, 그날의 선선한 바람이 참으로 즐거웠으나, 몸이 너무 지쳐있었다. 한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낸 터였다. 이렇게 까지 하여 직장을 다니며 살아야 하는가, 회의감으로 내 마음도 잔뜩 구겨져 있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힘든 상태로 길 위에서 20분을 서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유독 그런 날이 있다. 지독히 지치는 날이 있다. 내가 택시를 잡아 탔던 그날은 바로 그런 날이었다.


택시는 순조롭게 잡혔고 나는 금방 택시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내가 차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택시는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어 섰다. 나는 아까 거리에서 만났던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차창을 내렸다. 차창을 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청량한 바람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내 얼굴 위로 춤을 춘다. 문득 내가 눈길을 던진 곳에도 춤을 추는 생명들이 있었다. 가로수 주변에 핀 이름 모를 가을꽃들이 어깨춤을 덩실거리듯 바람이 이리저리 날리며 환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명한 푸른빛이 아름다웠다. 바람에 색을 입힌다면, 바로 저 꽃과 같은 색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없이 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노래 가사 하나가 내 머릿속을 관통한다.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 놓으리.



그렇다. 조용필의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래 가사 중 일부가 불현듯 떠올랐다. 머릿속에 떠오른 가사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여전히 작은 꽃들은 바람 따라 파란빛을 일렁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꽃을 바라보며 노래 가사를 생각하니, 내 가슴에 맑고도 파아란 물이 서서히 스며드는 듯, 상쾌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눈부시고도 따뜻한 어떤 빛이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높고도 맑은, 티 없이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늘진 곳에서 추위에 떨다 쨍하게 떠오른 태양 빛에 몸을 녹이는 듯했다.


그것은 기실,

노래 가사를 따라 내 머릿속에 그려진 여러 그림들 때문이었다.


그 장면 속에는

나를 사랑하는 신(神)의 손 하나가 

나의 미소를 바라며 내가 지나가는 자리에 

일부러 예쁜 꽃을 심는 장면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내가 지나는 자리를 미리 알고 

일부러 나에게만 보이는 작은 꽃을 심어 

위로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이 

내가 지나는 자리를 미리 알고 

일부러 맑은 가을 하늘을 닮은 꽃을 심어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아이들의 환호가 

내가 지나는 자리를 미리 알고 

일부러 많은 꽃들을 심어 응원하는 장면이 있었다.


울컥했다.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이 이런 것이라니, 나는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인가. 겨우 몇 가지 일에 지쳤다고 하여 삶을 비관할 텐가. 이제 신호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택시 앞 유리창 너머로 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지나 이쪽 편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 육체의 불편함이 내게도 전해질 정도로, 노인은 매우 힘겹게 한 발 한 발을 지면에서 떼내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제 더 이상 남일 같지 않은 것은 내게도 이제 '늙음'을 통찰할 수 있는 성숙함이 생겼기 때문인 것일까. 저 노인의 고통 속에서 언젠가는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될 인류의 '늙음'에 대한 고통에 마음이 아파오는 것은, 이제 나도 조금쯤 연민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죽음과 가까워 보이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오늘 힘든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 하루를 힘든 마음으로 살지 않아도 누구나 그 끝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신호가 끝나고, 택시는 출발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돌려 멀어져 가는 꽃들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조용필의 <바람이 전하는 말>을 찾아 내 귓가에 들려주었다. 오늘을 사는 나를 위해 위로를 건네며. 방금 보았던 꽃들을 내 마음속에 그리며,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며. <바람이 전하는 말>은, 조용필의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간 이들이 내게 전하는 위로와 사랑이었다.


그렇다. 나라는 존재가 지금을 사는 것은 내게 전달된 많은 이들의 사랑 때문이다. 내 안에 켜켜이 담긴 많은 이들의 사랑이, 사랑받았던 나의 기억이, 이대로 흩어진다 생각하면 너무나 아까운 것이리라. 인생의 끝의 끝에서도 바람이 되어서라도 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먼 훗날,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그 자리를 찾아 꽃을 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금방 고개를 저었다. 먼 훗날이 아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보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꽃을 심듯 글을 쓴다. 한 글자 한 글자 속에 사랑을 심어 당신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두어본다. 그렇게 오늘도 살아갈 힘을 얻어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바람이전하는 말(작곡 김희갑 / 작사 양인자 / 노래 조용필)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 갔느니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소리라 생각하지 마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 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 나면 낙엽의 연기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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