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열매에서 구린내가 난다.
주의해 주세요. 구린내가 향기롭다.
- 독은 아름답다 / 함민복 -
사랑은 그런 것이리라. 사랑이 이미 내 곁에 있더라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면 사랑은 존재를 잃게 된다. 은행나무 열매에서 나는 구린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사랑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된다.
발밑을 구르는 은행 열매 위에 가을이 서성이고 있었다. 여전한 더위에 가을이 올 것이라 생각조차 못했던 순간에도, 가을은 이미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가을을 맞아 얼마 전,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 네 가족에 친정 아빠와 엄마까지, 여섯 식구의 나들이었다. 고즈넉한 한옥 식당에서 정갈한 음식을 먹고, 담담하게 한주의 이야기를 나누는 주말의 특별한 일상이 평온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식당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여전히 아이다운 모습을 잃지 않은 남매가 사랑스러웠다.
"혹시 이 근처에 서점이 있을까?"
식당을 나서는 길에 아빠는 이곳, 작은 소도시의 읍내에 서점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책을 찾는 중이셨다. 대도시의 대형서점에서 구할 수 없으니 이렇게 사람이 적게 사는 곳에서는 오히려 재고가 있을 것이라 여기신 듯했다.
아빠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곧장 멀지 않은 읍내 서점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읍내 서점에도 한강의 책은 매진이었다. 매진된 책은 며칠 후에야 들어온다는 안내 문구가 서점 기둥에 붙어있을 뿐이었다. 엄마는 별것 아닌 일로 온 식구가 고생했다고 미안해하셨지만, 그러나 나는 그것대로 좋았다. 푸르른 가을 하늘아래 향기롭던 금목서의 꽃도, 소박한 서점의 분위기도 마냥 기꺼웠던 날이었다.
그렇게 한 주가 다시 지났다. 일주일 전에 무엇을 했는지 까맣게 잊을 만큼 숨 가쁘게 다시 찾아온 주말이었다. 지친 몸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치우는 어수선한 때, 다급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피곤한 상태로 누구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니 신경이 곤두섰다. 불편한 감정으로 인터폰을 들여다보니 거기엔 아빠의 모습이 있었다. 곤두섰던 감정이 물러서고 의아함이 앞섰다. 미리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일까 싶어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불쑥 책 한 권이 내 품을 파고들며 안겨왔다.
"한강이 처음 쓴 책이다."
"여수의 사랑? 어떻게 구하셨어요?"
"일주일 동안 서점을 또 다녀봤지. 마침, 방금 동네 가게에 한강 책이 한 권 있는 것을 보고 사 왔다."
"힘들게 구하셨는데, 아빠가 읽으셔야죠."
"이 책은 꼭 너에게 주고 싶었다. 한강이 처음 쓴 책이라니까... 그럼, 간다. 들어가라."
아빠는 내 손에 한강의 책이 잘 들려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대문을 닫고 돌아섰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내 손에 들린 책의 볼륨감이 낯설었다. 아빠의 옷자락에 매달린 가을의 찬 공기가 현관에 들어와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손에 들린 책의 낱장 사이사이에도 서둘러 달려온 아빠의 찬 숨결이 스며있었다.
책을 차분히 볼 여유가 없어 일단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자정이 지나서야 <여수의 사랑>을 펼쳐보았다. 표지를 들추니, 책날개에 한강의 이십 시절 사진이 박혀있었다. 한강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 너머로 스무 살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의 반대로 원했던 국문학과를 갈 수 없었던 스무 살의 나, 그 뒤로 5년의 방황이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길이
어딜 찾아가고 있는지
스무 살 중반이 되어서야 내가 선택한 대학에 진학하였다. 열심히 공부해서 조기졸업을 했다. 덕분에 모교 대학원에서는 장학생으로 석사 과정을 제안하였다. 간절히 원하던 바였다. 부모님이 원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보다는, 공부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서둘러 직업을 갖길 바라는 그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까마득히 멀어지는 날들
행여 낯선 곳은 아닐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얻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이 편안해질 줄 알았다. 빨리 편안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공부만 했다. 대학을 조기졸업하고, 직장도 빨리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있었다. 매일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내가 가진 길을 걷어차고 싶다는 충동과 현실에 타협하길 원하는 또 다른 나와의 전쟁이, 매일 매 순간 반복되었다.
부모님은 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 부른 투정이라 여기는 모습이 선명했다. 주인공 '정선'이 구역질을 하며 삶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나의 이십 대의 모습이었으니까.
내 어깨 위를 누른 삶의 무게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어
<여수의 사랑>은 꽤 두툼했다. 책은 내 손 안에서 한 장 한 장 왼편으로 넘겨지며 내 기억 속의 고통을 함께 겪어내었다. 왼쪽에 쌓인 책장이 두터워질수록, 책장 사이마다 스민 아빠의 찬 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빠의 옷자락이 휘몰아 온 가을 공기가 현관을 지나 나의 곁에 가만히 앉아 날 지켜보고 있었다.
책장을 쓰다듬으며, 지난 시간들의 나를 돌이켜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부모님의 바람과 어긋났다. 그러나 그것은 그뿐이다. 기실, 선택은 내 손에 달려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내 삶을, 내가 선택하여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반대했을지라도, 부모님은 부모님의 방식대로 날 사랑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자신의 두려움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고, 나에게 똑같은 두려움을 안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느새 차가운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외침!
처음에 가졌던 마음은 그대로
일렁이는데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아도 하고 싶은 일 그 하나가 여전히 마음에서 덜어지지 않는다면, 길은 하나뿐이다. 그저 덮어놓고 시작해 보는 것. 바로 그것이다. 문득 장자(莊子)에 등장하는 거대한 물고기 곤(鯤)이 떠올랐다. 북쪽 바다에서 살던 물고기 곤(鯤)은 어느 날 붕(鵬) 새로 변해 남쪽 하늘로 날아가게 된다.
이 길에 힘이 겨워도
또 안된다고 말해도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이 책은 꼭 너에게 주고 싶었다. 한강이 처음 쓴 책이라니까"
'처음', '처음'...아빠가 툭 던지고 간 말이 자꾸만 맴을 돌았다. 작은 읍내 서점에서 간절히 책을 찾던 아빠, 일주일 내내 동네 서점을 돌았을 아빠가 떠올랐다. 서점에서 이 책을 구매하고는 최대한 서둘러 날 찾아오는 아빠의 모습도 눈에 보였다. <여수의 사랑>에는 아빠의 사랑이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그래도 된다고. 나를 향한 당신의 언어가 책장마다 켜켜이 담겨있었다.
두 팔을 크게 펼쳐
더 망설이지 않게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붕(鵬)이 되기 위해서는 차갑고 어둔 북쪽 바다에서 물고기로 살아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고통의 단련이 있지 않으면 각성할 수 없다. 날개가 돋지 않는다. 지난 시간 동안, 아픈 만큼 나 또한 성장했고, 앞으로의 삶은 내 선택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변할 때다.
그러나, 붕새가 날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붕새를 띄울 거대한 회오리 바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그것은 사랑이었다.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스스로를 향한 사랑. 무등을 태우듯 띄워 올려주는, 나를 믿어주는 다른 이의 사랑. 그 사랑이 모여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고, 그 회오리는 커다란 붕새를 하늘로 띄우는 것이다.
그래도 돼, 늦어도 돼. 새로운 시작
비바람에,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아
지금이야 그때, 이젠 믿어
<여수의 사랑>을 덮으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아주시는 아빠를 발견한다. 그것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사랑이다. <그래도 돼>를 노래하는 가수 조용필의 뒷모습에서도 이런 깊은 사랑을 느낀다. 누구보다 먼저 붕(鵬)으로 변하여 끝없이 날갯짓하는 그, 그의 날갯짓으로 만들어진 회오리바람은, 이제 막 붕새가 되어 날고 싶어 하는 어린 붕새를 들어 올려줄 것이었다.
은행나무 열매의 구린내도, 금목서의 향기도, <여수의 사랑>에 서린 아빠의 온기도, 조용필의 <그래도 돼>도 모두 다 사랑이다. 나를 향한, 그 무엇보다도 깊고도 진한 사랑고백이다. 이제는 나도 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추운 바닷물에 몸을 떠는 물고기가 아니라 날개를 활짝 펴고 꿈을 향해 날아가는 한 마리의 새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랑이 있음에 감사하며, 나는 붕(鵬)이 되어있을 내일을 꿈꾼다.
그래, 그래도 된다. 이제 시작이다.
조용필 20집 title : 그래도 돼
조용필 20집 재킷
앞만 보고 달려왔던 길이
어딜 찾아가고 있는지
까마득히 멀어지는 날들
행여 낯선 곳은 아닐지
어느새 차가운 시선에 간직한 다짐을 놓쳐!
그래도 내 마음은 떠나지 못한 채 아쉬워
이 길에 힘이 겨워도
또 안된다고 말해도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차오르는 숨을 쏟아내도
떠밀려서 가진 않았지
내 어깨 위를 누른 삶의 무게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어
어느새 차가운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외침!
처음에 가졌던 마음은 그대로
일렁이는데
두 팔을 크게 펼쳐
더 망설이지 않게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지금이야 그때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이쯤에서 쉬어가도 되잖아
그래도 돼, 늦어도 돼
새로운 시작
비바람에,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아 Oh
Oh Yeah
이 길에 힘이 겨워도
또 안된다고 말해도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두 팔을 크게 펼쳐
더 망설이지 않게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지금이야 그때
이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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