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클래식 FM이 자동으로 켜지는 새벽 6시 15분, 음악소리에잠에서 깨고 보니 여느 때와 똑같은 하루였다. 피곤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힘을 내어 남은 잠을 떨치고 일어난다. 곧장 주방으로 가 물 한잔을 마시고 주방창을 열었다.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송이송이 꽃들이 둥글게 모여있어, 가지마다 진분홍 빛 부케가 달린 듯 탐스러웠다. 푸르게 펼쳐진 봄빛 하늘이 꽃잎마다 빛났다. 내가 좋아하는 핑크와 민트 빛 인테리어가 다른데 있지 않았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시계를 보았다. 버스정류장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평소와 같이 가방 안에 점심 도시락과 읽을 책 한 권을 담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최근에 산 운동화가 발을 가볍게 튕겨준다. 그래도 오늘은 3분여 일찍 출발했기에 마음이 여유롭다. 버스를 놓칠세라 종아리 근육이 당기도록 빨리 걷지 않아도 되는 날인 것이다.
버스 좌석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조용필 19집을 플레이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책을 한 줄 읽고는 버스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노래 가사를 음미해 본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한주의 피로가 뭉친 듯 내 곁을 맴돈다. 눈꺼풀이 조금씩 감겨왔다. 평소처럼 차는 막히고 버스는 심하게 덜컹댔다.
버스에서 내린 뒤, 신호를 두 번이나 기다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제 보도를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직장이다. 지금부터는 길을 건널 일이 없으므로 내 손에 들린 책을 펴 들었다.보도블록 위를 걸으며 책을 읽는 것은 중학교 때부터의 내 오랜 습관이었다. 위험하기에 고쳐야지 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내 단점이기도 했다.
직장 건물 앞까지 다 왔다. 그렇게, 여느 날과 똑같은 출근길이었다. 평소와 같았다면,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단 한 가지, 평소와 다른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계획된 것도 아니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커다란 일도 아니었다. 문득 책에 파묻었던 시선을 들어 아주 먼 곳을 응시했다는 것,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평소와 달랐을 뿐이었다.
아파트 단지 살고, 아파트에 둘러싸인 직장에 있다 보니, 나는 먼 곳을 잘 응시하지 않는다. 어쩌다 가끔 먼 데를 보고 싶어 시선을 들어도, 볼 수 있는 것이 어떤 집의 베란다 창일뿐이니, 기분 전환은커녕 오히려 민망함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바로 그 순간에, 마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내처 부른 것처럼, 그렇게 뜬금없이 고개를 번쩍 들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눈을 들어 바라본 곳에는 아파트 베란다 창문은 없었다.
대신 멀리 바라보는 내 시야에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지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과 맞닿은 저 6차선 도로가 내리막을 이루며 주욱 내가 있는 곳까지뻗어내려왔다.지평선 위에는 민트빛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한 태양이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것은 말그대로 '설렘'이었다. 때마침 내 귀에 들려오는 조용필의 '설렘'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내 직감은 알고 있었다.
저 지평선 끝에 서 있는 어떤 따스하고 찬란하며 빛나는 그 무엇이, 내리막 도로를 미끄러지듯 질주하여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에게 간다 설레임 그대로야 콧노래 불러 사랑의 세레나데
그것은 조용필의 힘찬 목소리를 빌어 내게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에 다 들릴 만큼 커다란 울림으로 '너에게 간다'며 선언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만을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나를 위한 사랑의 온기를 안고 내 품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나의 시간'들이었다. 증명된 것은 없다. 그저 근거 없는 느낌일 뿐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주 찰나의 시간, 평소와 다른 내 시선처리 하나로, 나는 아주 특별한 무엇을 느꼈다. 나의 빛나는 시간들은 6차선의 내리막 도로를 미끄러져 내려와 내게 도착했고, 나는 나의 시간들을 힘껏 껴안았다. 온몸에 설렘이 가득 퍼져나갔다. 내 심장은 춤을 추듯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그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엄마, 뉴스에서 태풍이 온다고 했어요?"
창밖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딸아이가 묻는다. 주말인 오늘은 토요일, 잔잔하게 비가 내리는 하루. 날이 흐리고 바람이 매우 거세게 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오래된 곳이다. 조경수도 꽤나 나이가 많아 수령이 높았고 그만큼 줄기가 두터웠는데도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였다.
이른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산책을 나갔다. 멀리서 바라본 겹벚꽃 나무 몇 그루는 초록빛 싹이 두드러져 보였다. 꽃잎이 바람에 거의 다 떨어져 이제는 분홍빛 옷으로 치장할 수 없게 되었다. 주차장 바닥엔 바람에 떨어진 겹벚꽃잎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주차된 차량에도 빗물에 젖은 꽃잎이 무수히 달라붙어있었다.
꽃잎 따라 시선을 옮기니 유독 꽃잎이 소복하게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바람에 날린 벚꽃 잎이 보도블록으로 마감된 인도(人道)의 높은 턱을 넘지 못하고, 보도블록의 가장자리를 따라 푹신한 진홍빛 카펫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분홍빛 눈이 쌓인 것 같기도 했다.
"와! 꽃길이다!"
아이들은 길게 이어진 꽃잎 카펫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인도 위를 걷던 남편이 가족 중 가장 먼저 진분홍 카펫 위에 섰다. 남편은 수북하게 쌓인 꽃잎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두 아이들도 아빠를 따랐다. 아이들은 인도에서 주차장가로 내려서서 아빠의 뒤를 따라 꽃이 쌓인 곳만 골라 발걸음을 옮겼다. 두 아이도 까르르 웃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인도 위를 뒤미처 걸으며 꽃길을 걷는 남편과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정말로 '꽃길만 걷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꽃길만 걸으세요.'
이 말이 한 때 유행이었다. 나 또한 '꽃길만 걸으세요.'라고 적힌 카드와 메시지를 꽤 받아보았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인생의 '꽃길'이라는 것이 진짜로 내게 올지 확신했던 때는 얼마나 되던가. 인생은 결코 꽃길이 아니라며 냉소했던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꽃길을 걷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알겠다. 내가 들었던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내게는 왜 그리 공허하게 들렸는지. 내게 쏟아진 무수한 덕담들이 내 현실 안에서 싹을 틔우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나 자신이 내 앞에 펼쳐질 '꽃길'을 믿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시간들을 꽃길이라 믿지 못하고 불안 속에 방치했기 때문이었다.
꽃잎이 떨어지기 위해서는 거센 바람이 불어야 한다. 바람이 있어야 꽃길도 있다. 그러나 나는 거센 바람만을 보며 불평하고 불안해하기만 했다. 바람이 만들어준 꽃길이 이미 내 곁에 있는데도, 나는 찾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불어올까 봐 두려워하며 움츠러들 뿐이었다.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은 달랐다. 거센 바람이 만들어 준 꽃길 위를 걸을 줄 알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이렇게나 즐겁게 웃으며 꽃길 위를 걷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그 꽃길을 진짜로 걷고 있는 것이었다.
가족들의뒷모습만 보고 섰던 나는 용기 내어 인도를 벗어나기로 했다. 바람이 수고로이 만들어 준 고운 꽃길 위에 조심히 한 발을 내려보았다. 포근하고 폭신했다. 까만 운동화를 둘러싼 진홍빛 꽃잎이 사랑스러웠다.
쭈그려 앉아 가만히 꽃잎을 들여다보며, 어제의 그 아침, 6차선 도로를 따라 갑작스레 내게 찾아온 '설렘'을 떠올려보았다. 어제의 그 설렘은 내게 이렇게 전하였다.
지금 걷고 있는 삶의 길이 아무리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잠시 주춤하는 순간들은 목적지를 향할 때 반드시 건너가야 하는 횡단보도와 같은 것이라고.
그렇다. 빨간 신호등에 몇 번씩 발걸음을 멈추게 될지라도, 터널을 지나느라 주변이 어두컴컴할지라도, 그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결국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바로 이 길이, 찬란한 나의 시간들과 연결되어 있는 바로 그 길인 것이다.
다시, 바람이 분다. 겹벚꽃잎이 문득 날아오르더니 앞서가는 가족들의 뒤를 쫓는다. 나도 꽃잎을 따라 몸을 일으킨다. 그 향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남편과 아이들의 뒤를 따라, 나도 꽃길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