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1집 - 창밖의 여자
가끔 실체 없는 그리움이 마음 저 밑바닥부터 올라올 때가 있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섰다가 이제 막 지는 해와 마주칠 때, 홀로 도보를 걸으며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볼 때. 바람이 세게 부는 어느 날, 왜소한 나뭇가지지의 몸부림을 바라보게 될 때... 혹은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업무 스트레스 때문일까. 숙면을 위해 커피를 끊은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가끔 늦은 새벽까지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잠은 오지 않고 이길 수 없는 피곤함에 머리만 아파오던 어느 밤. 가족들 모두 잠든 그 밤에 홀로 거실에 나와 조용필의 음악을 랜덤으로 틀어두고 베란다 창을 살짝 열었다.
창을 열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비가 내리는지. 코를 킁킁거려 보니 모래 냄새가 섞인 비냄새가 났다. 황사비도 사람들이 자기를 꺼리는 지를 아는지, 그 새벽에 몰래 내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좋아하지 않는 황사비의 냄새였지만, 그날따라 황사비가 측은하여 정이 갔다. 잠든 가족들 틈에서, 홀로 잠들지 못하고 몰래 거실에 나와 사부작거리는 내 모습과, 새벽에 소리도 없이 가늘게 내리는 황사비는 어쩐지 닮아 있었다.
-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몰래 혼자 존재하는구나. 나처럼.
가벼운 이불을 덮고 거실에 누웠다. 열린 창틈으로 새벽공기가 들어와 황사비의 내음과 함께 거실을 휘돌았다. 조용필의 노래가 조용조용 귓가를 간질였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들이마시는 내 숨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내 코를 통해 빨려 들어온 듯, 그리움이 순식간에 온몸 가득 채워졌다. 실체 없는 그리움과 맞닥뜨린, 그런 순간이었다.
사실, 그러한 그리움이란 내 코가 아닌 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창밖의 여자>의 전주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창밖의 여자>는 어쩌면 내 생의 근원을 함께 하였을 노래였다.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형체를 만들어갈 때, 이 노래는 내내 나와 함께였다고 했다. <창밖의 여자>는 열 달 동안 내 태교음악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누누이 듣고 자라왔다.
그러나 정작 <창밖의 여자>는 내가 좋아하는 조용필의 노래 베스트 100안에 들지 못했다. 그것은 노래가사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들을 때 비트와 리듬보다는 노래 가사에 더 집중하는 편이었다. 노래 가사를 들으며 장면을 상상하길 좋아했고, 마음에 드는 노래 가사는 일기장에 여러 번 필사하며 되새김질하기도 했다. 노래 가사가 내 기호에 잘 맞아야 노래를 온전히 좋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창밖의 여자>를 들을 때면,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자 유령'이었다.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이라는 첫 가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 소복을 입고서 흰 피부를 가진 여자 유령이 창밖에 어른거리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내었던 것이다.
유령이나 귀신이라면 질색을 했던 내게 <창밖의 여자>는 공포를 부르는 노래였다. 조금 더 커서 <창밖의 여자>의 노래 가사가 잊지 못하는 한 사람에 대한 간절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 진의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은 어릴 때의 기억이 강렬해서였으리라.
우습게도, 이렇게 나이 든 뒤에도 창밖의 여자만 들으면 한 남자를 따라다니는 여자유령이 생각났기에, 나는 <창밖의 여자>를 들을 때마다 노래 가사를 깊이 음미하기보다는 슬쩍 흘려듣곤 했다.
<창밖의 여자>는 이토록 내게는 친하지 않은 노래였기에, <창밖의 여자>의 전주를 들으며 '공포'가 아닌 '그리움'을 느꼈다는 사실은 스스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벽이었기에, 혼자였기에, 비가 내렸기에 그랬던 것이었을까.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은 불쑥 내 마음을 헤집으며 <창밖의 여자>를 낯설게 만들고 가만히 귀 기울이게 했다.
<창밖의 여자>는 조용한 새벽공기 속에서 물결처럼 일렁였다. 나는 연주의 한음 한음, 노래 가사 한마디 한마디, 조용필의 음성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듯 곱씹으며 들었다.
노래의 전주는 마치 바람소리와 같았다. 가슴에 구멍을 내는 서늘한 바람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피아노의 전주는 서정적으로 흐르며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이야기할 준비를 한다. 한 여자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가슴엔 언제나 눈물이 흐른다. 창밖을 바라보아도, 거리에 쓸쓸히 서 있어도 그는 언제나 그녀를 생각한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그리움이 짙어 고통이 된다. 그리하여 차라리 잠들게 해 달라 절규한다. 절규 뒤에 이어지는 기타 소리는 마치 거문고나 가야금을 튕기는 소리와 비슷했다. 기타의 후주에서 가야금의 음색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그 밤이 처음이었다. 그 한 음 한 음 속에 수천 년 서리서리 내려온 한국인의 한이 담겨있는 듯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이 노래는 아름다웠다. 세련된 음색 속에 한국적인 색채가 이렇게 절묘하게 섞일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리고 노래 속에 들어있는 그 간절한 그리움. 그리움에 가슴이 터질 듯 고통스러워하는 노래 가사 속의 남자의 감정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한 곡을 다 듣고 나서 갈급하듯 반복 듣기를 했다. 시적인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우스워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곧 숙연해졌다. 조용필의 목소리에 서린 고통은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창밖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것은 바로 내 모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기다리는 것은 한 인간이 아니라 나의 미래라는 것이었다.
나이 들수록 나의 천성을 누리며, 내가 원하는 방향과 내가 원하는 속도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진다. 창밖에 있는 나의 운명은 바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다.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운명과 조우할 수 있기를, 가로막혀 건너갈 수 없는 그 세계를 바라보며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고, 함께 있는 듯하면서 다른 차원에 있는 내 운명은 나와 닿지 않는다. 현재의 삶은 질곡이자 기다림의 고통을 감내하는 순간이 된다.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대부분도 사실은 업무 때문이 아니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 때문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창밖에 존재하는 나의 운명을 즐겁게 기다리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았다. 창밖의 여자를 그리워하는 그 남자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 창밖의 여자의 남자여, 부디 순간순간의 그 생을 누리고 살기를. 언젠가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림이 고통이 아니라 생의 축복이기를. 한 발 한 발 다리를 건너가듯 순리에 따라 그녀에게 닿기를.
그리고 나는 나를 향해 속삭인다.
"나 또한 부디 그러하기를."
선명하게 나를 괴롭히던 잡념들이 어느새 사라져 간다.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한기를 느끼고 잠에서 깨고 보니 벌써 깊은 새벽이었다. 베란다 창을 닫으며 창밖을 바라보니 황사비는 어느샌가 멈추어 있었다. 더 이상 먼지 냄새는 나지 않았다. 촉촉한 비의 냄새만이 잔잔하게 새벽공기 속을 떠돌고 있었다.
여전히 나긋나긋 들려오는 창밖의 여자를 들으며 나는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립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내가 언젠가는 완성할 나의 삶의 모습이 보고 싶다. 그 모습이 간절히 그립다. 창밖의 여자가 발표된 지 벌써 40여 년이 넘었다. 노래 가사 속의 그 남자는 이미 그리운 그녀를 다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그리워하자. 그러나, 고통스러울 만큼 안달하지는 말자.
창밖을 바라보며 다짐해 본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내 꿈은 이미 가로등처럼 내 곁에 서 있을지 모른다. 불이 켜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뿐. 그렇게 황사비와 함께 <창밖의 여자>를 들으며 새벽을 보내고,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나 싶었다. 그러나 다음 날, 기다리고 기다려온 3월의 내 생일에 나는,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아, 살아가는 일은, 역시 쉽지 않은 것인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찾아가게 되리라.
내가 바라는 운명이 있는 그곳.
"거친 광야를 가로질러
눈 덮인 산을 넘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 찾을 테야
나의 낙원으로
네가 있는 그곳"
<그리운 것은, 조용필 19집 중에서>
창밖의 여자
(조용필 작곡 / 배명숙 작사 / 조용필 노래)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