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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Aug 26. 2024

산타를 기다리며

조용필 크리스마스 앨범 [크리스마스를 조용필과 함께(1983)]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
우리 썰매 빨리 달려 종소리 울려라!"

-징글벨/크리스마스를 조용필과 함께(1983)-

가을이 조금씩 다가오는 요즈음, 매미소리는 어느덧 사라지고 초저녁부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밤 기운에 서늘한 한 줄기 바람이 섞였다. 그러나 아직은 엄연한 여름. 한여름이 키워낸 녹음이 무성한 8월의 한낮에, 내가 선곡한 노래는 한겨울에나 듣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아름다운 곡들이 장르별로 포진해있다. 클래식 연주곡은 물론이고, 냇킹콜, 엘라피츠제랄드 등의 재즈보컬의 캐럴송, 조지마이클과 머라이어 캐리의 크리스마스 시즌 팝송은 언제 들어도 좋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이다. 이번에도 내가 선택한 크리스마스 캐럴은 역시나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이다.


그 8월의 한낮에, 남편은 아들아이와 함께 미용실에 나가고, 나는 딸아이와 단 둘이 집에 남았다. 딸아이의 방이 지저분해 보여 방을 정리하라고 한마디 했더니, 딸아이는 '청소하기 싫어요!' 하고는 이불속에 쏙 들어가 버리더니 낮잠까지 잔다.


사위(四圍)가 고요했다. 날도 덥고 마음에도 열이 났다. 한숨을 쉬며 물한잔 마시려고 보니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감이 눈에 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고무장갑을 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틀어놓고 설거지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캐럴을 들으니 힘들게만 느껴지던 설거지가 조금은 손에 잡힌다. 항상 이렇다. 힘들때면, 혹은 살다가 흥을 잃을 때면 이 앨범을 듣는다. 그러면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캐럴의 가사와 조용필의 음색이 귀에 쏙쏙 담긴다.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밥그릇을 쓱쓱 닦는데 열중하다 어느덧 내 마음은 노래 가사를 따라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방과 후의 고요한 집에서, 크리스마스 앨범을 엘피로 틀어놓고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내 마음이 거기 있었다.






88올림픽이 끝난지 몇년 안되었던 그때, 우리 가족은 경기도아담한 아파트에서 평온하게 살았다. 학교 생활도 즐겁게 해 나갔다. 우연히 나간 반장선거에 당선되어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성적도 덩달아 올라 친구들의 인정도 받고있었다.


방과 후에 집에 오면 엄마는 이제 막 지져낸 계란 부침을 상에 올려 점심을 차려주었다. 소소한 밥상이지만 엄마와 동생과 함께하는 점심밥상이 좋았다. 계란 부침의 고소한 냄새는 식사하는 내내 나를 은은히 감 싸돌았다.


12월이 되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아빠는 LP음반으로 조용필 크리스마스 앨범을 자주 들려주셨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이제는 내가 먼저 크리스마스 앨범을 턴테이블에 올려 틀어두었다. 캐럴을 들으며 점심을 먹고 나면, 엄마와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신기한 걸 보여줄게."

어느 날 엄마는 젓가락을 들고서 달걀에 작은 구멍을 냈다. 작은 구멍으로 힘겹게 흰자와 노른자를 빼고 나자 달걀껍데기는 동그란 모양을 유지한 채 속 빈 공이 되었다. 엄마는 내게 반짝이는 색종이를 건네주셨다. 달걀이 깨지지 않게 껍데기 위에 색종이를 조심스레 붙이고 단단하게 말렸다. 그러자 달걀껍데기는 멋진 트리 장식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에는, 엄마가 물감으로 산타할아버지를 커다랗게 그려내었다. 탈지면 솜으로 산타의 수염을 붙이는 것은 내 몫이었다. 솜씨 좋은 엄마가 그린 실물크기의 산타할아버지는 정말로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겨울 내내 벽에 붙여진 산타할아버지를 뜯어보며 실제로 만날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아빠는 친구들을 초대하여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틀어놓고 다과를 나누었다. 마와 함께 만든 크리스마스트리가 어여쁘게 빛났고 엄마가 그려주신 산타도 파티에 함께 했다.  나는 아빠 친구의 딸을 동무 삼아 함께 춤을 추었다.


시간들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안온했고 평온했다.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은 12월을 매일 같이 함께 했다. LP앨범은 쉼없이 돌아가며 골짝골짝마다 나의 순간을 기록했다.


다음 해 초, 어른들은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해가 바뀐 뒤에도 나는 학교에서 임원을 하고 있었고, 담임선생님은 특히 나를 예쁘게 보아주셔서 더욱 즐겁게 생활하던 때였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글씨를 쓸 때마다, 뭐든지 칭찬해 주시던 착한 선생님과 정든 친구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들의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내가 고집을 부린대도 이사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떼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오랜 날 지나면 내 너를 잊으랴
해와 달이 또 바뀌면 내 너를 잊으랴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 영원히
사모하는 그대를 잊지 않으리라

-올드랭사인/크리스마스를 조용필과 함께(1983)-


이사 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새롭다는 것은 변화이고, 변화의 가짓수는 참으로 많다. 새로운 삶이 전보다 더 좋은 것으로만 보장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던 새로운 삶은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된 내게는 최악이었다.


이사간 집은 거실 없이 상하방으로 이루어진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셋방이었다. 화장실은 마당에 있었다. 셋방사는 사람들이 공용으로 사용하여 불결했고 냄새가 심했다. 상상하지 못했던 열악한 주거 환경에 그렇지 않아도 서글펐는데, 더 힘든 것은 방과 후에 돌아온 집에 더이상 엄마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학교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수도권에서 전학 왔다며 나를 눈여겨보던 담임선생님은, 무언가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었는지, 갈수록 눈에 띄게 차별 하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은 학급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나를 앞으로 불러내어 야단을 쳤다. 야단을 맞은 거의 모든 일이 나와 관련이 없는 일이라 억울했다. 다른 아이들 앞에서 야단을 맞고 면박을 당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수치심과 모멸감이 쌓여갔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겨울나무/크리스마스를 조용필과 함께(1983)-

내가 왜 이런 상황을 견뎌야 하는지 그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부모님을 더 힘들게 할까 봐 먼저 물어보지도 못했다. 혼자 숨죽여 울다 잠드는 날이 많았다. 조금씩 마음이 부서져 내렸다. 나는 조용필 크리스마스 앨범의 '겨울나무'와 꼭 닮아갔다. 겨울나무가 되어 추위에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턴테이블과 엘피판이 부모님의 방 한켠에 여전히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이 밉고 어른이 무섭고 내가 미워질 때면 빛이 들지 않아 어둔 안쪽 방에 들어가 턴테이블을 돌렸다. 조용필의 앨범을 들으며 숙제를 하면서 부모님이 돌아오실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바람이 너무 거세어 어찌해야할지 모를 땐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틀었다.

캐럴을 들으며 작년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다 낮잠에 빠지기도 했다. 겨울나무가 휘파람을 불며 추위를 견뎠던 것처럼, 나는 턴테이블과 조용필의 엘피를 껴안고서 그 시간을 견뎌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한다. 특히나 마음이 불편해질 때면 어김없이 이 앨범을 찾아들었다. 스스로도 그 이유는 알 지 못했다. 그냥,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날, 8월의 오후에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노래 한 곡 한 곡이 내 손을 잡고서는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어렸던 나에게 데려갔던 까닭이었다.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그랬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수시로 듣게 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위로가 필요했었다. 동화 <성냥팔이 소녀> 소녀가 성냥에 불을 붙여 나타나는 환상에 이끌렸던 것 처럼.


내게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은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개비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들으며 그 안에 새겨진 기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가족이 행복했던 기억,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던 온전한 행복감. 그 모든 것들을 노래를 통해 다시 되새겼던 것이다.


사실, 크리스마스 앨범이나 성냥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성냥팔이 소녀 결국은 얼어 죽고 말았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 속에는 내가 사랑받았던 실재했던 나의 경험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캐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나는 어디에서든 사랑받았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이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망각이었을까, 회피였을까, 방어기전이었을까. 마음이 힘들때마다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을 찾아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캐럴을 좋아하니까 듣는다' 생각하며 진정한 내 마음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들이었다.


80년대의 고아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캐럴의 가사, 깊은 호흡과 힘찬 발성으로 진정(眞情)을 전하는 음색, 그 속에 각인된 사랑의 기억들,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앨범이 나를 살게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사춘기 소녀의 어려운 나날을 힘껏 껴안아주었다.


지금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며 예전처럼 캐럴 앨범을 자주 듣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한여름에도 크리스마스 앨범이 주는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 바깥 계절에 상관없이, 마음에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수시로 들고 나기 때문이다.


사춘기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때, 내가 쓴 글이 공모전에 탈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오늘 처럼 글쓰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질 때, 그럴 때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어린 시절의 나를 불러내어 다독인다.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이겨낸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번 일도 잘 이겨낼 거야. 이겨내고 나면, 또 자연스럽게 웃게 될 일이 생길 거야."


한 시간 뒤, 짜증을 내며 잠이 든 딸아이가 깼다. 잔소리하지 않고 하루를 꼬박기다리자, 딸아이는 밤늦게 자신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환해진 아이의 방을 보며, 나는 활짝 웃었다. 그렇다. 결국에는 웃을 수 있는 날이 온다.


아, 난 여전히 조용필의 캐럴 앨범을 사랑한다. 크리스마스 앨범은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환상만을 보여주는 음악이 아니다. 내게 사랑의 강인함을 일깨워주는 앨범,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노래해 주는 나의 응원가이다. 캐럴을 들으며 나는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한다. 환상이 아니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꿈꾼다. 


밤이 어두울수록 선물보따리를 등에 멘 산타할아버지의 모습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마음에 칠흙같이 어둔 깊밤이, 살을 에는 추운 겨울 바람이 찾아올 땐, 조용필의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을 들으며 심술을 덜어보자. 선물을 한보따리 가득 멘 산타 할아버지가 캐럴에 이끌려 더 빨리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모두 잠든 어두운 밤에
선물 한아름 가지고서
산타할아버지 오신다네.

울지를 말고요, 기다려보세요.
심술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선물 안 줘요.

우리 모두 착한 아이들(어른들^-^),
예쁜 선물 주시려고 산타할아버지 오신다네.

-산타 할아버지 오시네/크리스마스를 조용필과 함께(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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