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사랑의 자장가(조용필 베스트 앨범2)
알람이 울렸다. 오전 6시 30분. 내가 어렸을 적엔, 오전 7시 이전은 모든 생명이 잠들어 있는 신비로운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렸던 시절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6시 30분은 배수진이다. 이때 일어나지 않으면 직장에 지각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눈치없이 자꾸만 울리는 알람을 끄고서, 애써 주방으로 향했다. 조금 전 먼저 주방에 들어간 남편이 냉장고 문을 열고 식재료를 보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라라라라라...."
남편이 읊조리는 곡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허밍을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 불쑥 듣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쁜 일 부터 처리하느라 어느 틈에 잊어버린 노래였다. 남편의 허밍이 그 노래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나는 반색을 하며 음악앱으로 음원을 찾아 틀었다. 그렇게 조용필의 '사랑의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동편에 파란 별이 뜨면,
그대는 포근히 꿈을 꾸리
노래를 익히 잘 알고 있는 남편은, 음악의 전주만 듣고 농담처럼 말한다.
"이제 아이들 깨워야할 시간인데, 오히려 더 재우려고 하는 건 아니지?"
남편의 이 한마디 말에, 나도 웃고 남편도 웃었다.
듣고 싶었던 노래, 그러다가 문득 잊어버렸던 노래, 그 노래를 다시 기억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마냥 피곤에 짓눌려 왔던 아침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 소풍서 참여했던 보물찾기에서, 운 좋게 종이쪽지를 찾은 것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단 한번도 보물찾기를 성공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기분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자장가를 들으며 두 아이를 깨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도시락을 싸들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서로의 평온한 하루를 기원하면서 큰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고 남편과 포옹을 나누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오늘은, 날씨가 맑다.
시원한 바람이 나를 향해 서둘러 달려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하늘은 투명하게 파란 빛을 띄며 가을을 알렸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내 귓가엔 여전히 '사랑의 자장가'가 들려오고 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한 곡 반복으로 듣고 있는 이 노래가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마리아, 어여쁜 내 아가야.
아침을 여는 지금 이 순간,
한 생명, 한 생명이 모두 신(神)의 아이.
노래 가사 속의 '마리아'는 아이를 향한 신(神)의 애칭이었다.
신(神)이 나를 향해 어여쁘다, 어여쁘다 말을 건네고 있었다.
살며시 기대앉아 속삭여 주면,
부르리라 사랑 노래를
나뭇잎 사이를 헤엄치는 푸른 물결의 하늘로,
녹슨 철제 담장에 소담히 피어있는 파란 꽃으로,
내 머리칼을 데리고 노는 바람으로,
신은 그렇게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부르리라 사랑 노래를
생명속에서 사랑을 키우는 신의 목소리가
인간의 목소리를 빌어 내 귓가를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길.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인데도 오늘은 다르다. 더욱 생생하고 더욱 아름답다. 길가에 수북하게 자란 잡초더미, 철제 담장에 피어있는 어여쁜 꽃과 노랗게 빛이 바라고 찢긴 나뭇잎, 아침 근로를 하기 위해 벤치에 모여 앉은 노인들의 깊은 주름이 가을빛 햇살에 드러났다.
모두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 모든 것을 다 껴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신이 존재한다면, 나의 위태롭고 어리석고 심술 많은 부족한 부분까지도 사랑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시작은 다른 날보다 더욱 순탄치 않았다. 평소보다 잠에서 깨는 일이 더욱 힘들었다. 피곤한 몸으로 거칠게 움직이다가 얼마전에 큰 맘먹고 구매한 값비싼 로션을 바닥에 깨뜨렸다. 잠에 취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걸레질을 구석구석 여러번 반복했다.
평소의 나라면, 아침에 비싼 화장품을 깨뜨리고 나서는 '재수가 없다'며 뾰루퉁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으리라. 그러나 남편의 기분 좋은 허밍이, 그로 인해 듣게 된 조용필의 '사랑의 자장가'가 나의 하루를 '사랑'으로 채웠다. 세상을 어둡게 보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웠다.
가을 아침의 공기 속에서, 어떤 세상 속에 살아갈지 결정하는 일은 바로 내 손에 달려 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깨진 화장품을 신호로 온 세상에 저주를 퍼부을 수도, 허밍 한 소절, 노래 한 곡으로 세상을 사랑할 수도 있다. 세상을 만들어가는 신(神)은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랑 속에 충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성숙함을 경험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깊고 깊은 우울의 나날들을 잘 견뎌내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감사했다.
이렇게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지만, 지금 이순간은 열심히 걸어야 한다. '곧 도착' 알람이 울리는 저 28번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타야한다. 자, 열심히 걸어보자. 비록 튼실한 가을무와 닮아 아쉽지만, 여전히 잘 기능하는 사랑스러운 나의 다리는, 더욱 부지런히 버스정류장을 향해, 나의 하루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