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ilelife Dec 17. 2023

떠남은, 성장의 시작이다-물화의 시간(物化의 時間)

조용필의 <I Love 수지>에서  <꿈>으로.

어린 시절, 나는 이야기를 읽고 상상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크리스마스란 공식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었기에 특별했다. 산타할아버지, 산타를 돕는 요정들, 루돌프 사슴, 잠든 밤 사이 산타가 몰래 놓고 간 선물, 아주 먼 시대를 살다 간 예수와 그를 핍박했던 로마시대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의 밤이 화려한 것은 오너먼트와 전구의 불빛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풍성한 이야기들이 가득한 밤이기에 더욱 반짝이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면, 이제 공상과 상상의 세계는 끝나고, '지금'과 '이곳'만 남는다. 나는 항상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의 모습들이 궁금했기에 머나먼 어디든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였을까, 초등학교 때 유독 끌리는 노래가 있었으니, 이치현과 벗님들의 <집시여인>과 조용필의 <I Love 수지>였다. 돌이켜보면, 어린 나의 '떠남'에 대한 바람을 잘 반영하고 있던 가삿말 때문이었다. 특히  <I Love 수지>의 노래 가사는 그냥, 바로 나였다.


기차를 보면 떠나가고 싶어 하던, 한 소녀가 있었죠.
갈 곳도 없는데 자꾸만 보채던, 그 소녀를 나는 알아요.
구름을 보면 눈물이 난다 하던, 한 소녀가 있었죠.
먼 곳이라 부르는 어딘지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어 했었죠.

하지만 위의 가사에 이어지는 이 노래의 후반부는, 어렸던 나에게 이해불가였다. 이곳을 떠난 수지가 '먼 곳'에서 '이곳'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다고 한다. 이를 달래기 위한 자장가를 불러주겠다고도 한다.


'소망대로 먼 곳에 갔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울고 있을까? 나 같으면 매일이 즐거울 텐데.'


노래의 전반부는 신나게 따라 부르다 후반부에 오면 갸우뚱거리기를 수없이 했으나, 결국 나는 '수지'가 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년을 맞았고,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떠남'조차 실현해보지 못했다.


드디어, 어느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서울권 대학으로 진학한 덕분이었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내 꿈을 펼쳐보고 싶었다. 홀로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서울 구경을 다녔다. 내 힘으로 얻은 떠남의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열심히 살아온 대가로 대학생활에서 성과는 분명 뚜렷했으나 마음은 점점 힘들어졌다. 남들보다 공부를 두 배로 하니, 학과 장학금에 외부 장학금도 받아냈다. 운이 좋아 이벤트도 자주 당첨되어 무료 연극과 콘서트, 영화도 자주 보았다. 옛 궁도 자주 거닐었으며 무료 전시회도 찾아다니며 즐거운 문화생활을 했음에도, 내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다. 


이렇게 대학 2년 하고도 절반이 지날 무렵, 이제 나는 거리를 걷다 문득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길 가다 그냥 툭, 공부하다 그냥 툭, 김밥을 먹다가 그냥 툭, 그렇게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우울증이었다. 새로운 자극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로운 곳은 다시 익숙한 곳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 속에 진정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날 살리는 모태의 사랑의 부재. 그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이 계신 곳, 혹은 어쩌면 내 생명이 시작된 그 어느 태초의 근원, 그 어디쯤이 몹시도 그리웠다. 생의 근원은 '죽음'이 아닐까 생각하며 자꾸만 밤잠을 뒤척였다. 그쯤 되자 <I Love 수지>의 후반부 가사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이전에는 뜻도 잘 모르며 따라 부르던 조용필의 <꿈>의 가사가 내 안에 사무치기 시작했다.



화려한 도시를 찾아서 떠나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불빛으로 반짝이는 서울 시내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서울의 불빛은 내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아닌 냉기가 흐르는 냉동고의 불빛이었다. 도시의 온기 없는 불빛을 홀로 맞서기 힘든 날이면, 조용필의 <꿈>을 들으며 산책하곤 했다.


미성에 가까운 조용필의 목소리가 <꿈>에서 만큼은 더욱 다르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듯 거칠고, 마치 대도시의 갈라진 콘크리트 벽처럼 건조하다. 그 목소리는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먼저 겪어 본 선배가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해 주는 듯했다. '떠남을 견디는 건, 힘든 일이란다. 너만 힘든 것이 아니야.' 


그랬다. 어릴 때 동경했던 '떠남'의 결과는 내 예상 밖이었다. '떠남'은 '떠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떠나온 의미'를 완성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것을 떠날 때는 알지 못했다. '떠나온 의미'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떠남'의 상태를 홀로 견디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곤이지지(困而知之)'라고 했던가. 내 온몸으로 힘들게 경험해 본 뒤에야, '떠난다'는 의미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떠남'이란 공간에만 적용되는 의미는 아니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는 '공간'이 아닌, '존재'자체를 떠나는 상황이 등장한다. 북해에 사는 '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물고기임을 버리고 '붕'이라는 거대한 새로 변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물고기가 갑자기 새로 변한다. 아무런 맥락도 없다. 그저 내 마음이 원할 때, 때가 되어 변하고 자기가 가야 할 곳을 알아 스스로 찾아 떠나간다. '붕'이 향하는 '남명(南冥)', 즉 남쪽 바다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리 애써 가는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쪽바다에는 '붕'을 살리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등장하는 '물화(物化)'라는 개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물화'의 한자를 해석하자면 말 그대로 '물(존재)'의 '변화'이다. 크게는 생명이 죽음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순환하는 순간이며 인간사로 보면,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 결혼하여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는 순간이다. 일상으로 들여다보면, 새로운 습관을 가지게 되는 순간, 기존에 이해하지 못했던 노래 가사를 문득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이 순간들은 모두 기존의 나를 떠나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물화'란 떠남으로 인해 시작된다. 공간, 시간, 관계 등 그 무엇이든 간에 떠남은 변화의 신호탄이다. 이 변화가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 '붕'이 '남쪽바다'에 도달하기 위해 피로를 견디며 수없이 날갯짓하는 과정 견뎌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기존의 나를 철저히 떠나 새로이 성숙한 나를 맞이할 수 있다.


<I Love 수지>에서 출발하여 <꿈>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에는 이 '물화의 시간(物化의 時間)'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떠남'을 동경하여 화려한 도시를 향해 떠났으나 '이곳, 고향'을 그리워하며 울고, 초라한 골목에서 또 울다가 슬퍼질 땐 홀로 눈을 감고 견디는 것이 '떠남 그 자체'를 견디는 과정이다. 그리고 나면, 붕새가 드디어 '남쪽바다'에 이르듯, 드디어 '꿈꾸던' 그 무엇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그토록 어딘가로 '떠남'을 갈구하는 것은 성숙을 위한 본능이리라. '물화'는, 내가 타고난 그 무엇을 찾아가는 여정이자 생(生)의 본능이다. 즉 진정한 '물화'는 외부의 충격 때문이 아니라, 각 존재마다 성장에 대한 염원을 동력 삼아 '떠남'을 실행하는 데서 시작된다. '물화의 시간'이 없다면 성장도 멈춘다. 그러므로 성장을 염원할수록 우리는, 삶을 관통하는 내내 이를 겪어내야 하는 것이다. 


'떠남'으로 인해 힘들었으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떠남'으로 인해 나는 여러모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는 성장을 갈구하는 생의 본능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떠남'을 시도한다. '떠남'이 아주 거창할 필요는 없다. 이제는 예전처럼 극단적인 변화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아주 조그마한 변화도 이제 내게는 '물화'이며 '유의미'하다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각자 '물화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성장하는 존재들과 위로의 노래를 함께 듣고 싶다. 물화의 시간을 견뎌낸 이들의 수많은 위로가 우리 곁에 있음을 함께 기억하고 싶다. 그리하여 나와 당신의 오늘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자기 만의 '남명'으로, 각자의 '먼 곳'이자 '꿈'을 향해 조금씩 꿈틀대는 시간이 되길 소원한다.





조용필 <I Love 수지(작곡 조용필/조수지, 작사 양인자)>


기차를 보면 떠나가고 싶어 하던 한 소녀가 있었죠

갈 곳도 없는데 자꾸만 보채던 그 소녀를 나는 알아요

구름을 보면 눈물이 난다 하던 한 소녀가 있었죠

먼 곳이라 부르는 어딘지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어 했었죠 좋아하는 인형이랑 강아지도 모두 여기

있는데 I love 수지 이제는 먼 곳에서 이곳을 그리워

하면서 울고 있구나 I love 수지 자장가를 불러주마

I love 수지 


조용필 <꿈(작곡 조용필, 작사 조용필)>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