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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Jan 22. 2024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있나요?

조용필,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12집)

 "엄마! 이거 먹어도 돼요? 유통기한이 지났는데."


주말, 점심식사를 위해 온 식구가 차를 타고 맛집을 찾아 이동하는 중이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큰 아이가 내게 말을 건넸다. 뭘까 궁금하여 돌아보니,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단지 모양의 바나나맛 우유였다. 몇 주 전, 여행을 다니다 편의점에서 식구 수대로 사서 하나씩 나누어준 것이었는데, 큰 아이는 먹지 않고 차 안에 놓아둔 모양이었다. 마침 찬 계절이긴 하지만 냉장고에 넣어두지도 않았던 데다가 유통기한도 열흘이나 지나있었다.


"어머! 아깝게! 먹을 수가 없잖니! 그때 먹었어야지. 아니면 처음 받은 날, 차에서 내릴 때 챙겨 가서 냉장고에 넣어두었거나!"


한창 사춘기인 아이들에게 잔소리하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나는 이런 상황에 꼭 잔소리부터 튀어나오고 만다. 큰 아이는 머쓱해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큰 아이의 모습을 보며 마음으로 또 후회를 한다. 그저 '다음엔 그러지 말자.'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왜 그리 말이 많았을까. 


식당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앉으니, 큰 아이가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한다.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양 수저를 놓는다, 컵에 물을 따른다 하며 수선을 떠는 것이다. 그런데 저런, 자기 앞에 놓인 물컵의 물을 엎어버렸다. 아직 한 모금도 먹지 않은 물 한 컵이 식탁에 온통 들이부어졌다. 제법 넓게 퍼진 물줄기가 식탁을 내달려 내 치맛자락에도 왈칵 쏟아졌다. 


"조심 좀 하지 않고!"


나는 큰 아이에게 신경질적으로 다그쳤다. 온 가족이 나서서 화장지를 빼들고 식탁을 닦는다, 옷을 닦는다 하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는 와중에 큰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큰 아이의 표정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찌르는 듯 아파오며, 큰 아이의 모습 위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바로 초등학교 4학년, 이제 막 사춘기를 맞이하던 나의 모습이 말이다. 




항상 곁에 있던 부모님이 초등학교 4학년 때를 기점으로 하여 갑자기 바빠지셨다. 아침에 나가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들어오시는 부모님의 일과에 나는 한동안 매우 힘이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집에서 날 맞아주던 엄마의 모습이 익숙했던 나였기에, 갑작스럽게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려야 하니 마음이 고되었던 것이다.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삶은, 그저 하루하루 견뎌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이 너무나 지루할 때면 나는 설거지를 했다. 고단한 엄마가 집에 도착하여 깨끗한 주방을 보고 활짝 웃는 모습을 상상하면 설거지도 귀찮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설거지를 하면 십중팔구 그릇을 놓쳤고, 그릇은 그렇게 자주 박살이 났다. 엄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노력했지만, 엄마에게 오히려 성가신 일만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어느 날은 가사시간에 교과서를 통해 '달걀 삶기'를 배웠다. 이 정도 간식은 교과서를 보고서 스스로 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밤늦게 오시는 부모님께 저녁 간식을 만들어두고 짜잔! 하고 내밀어드리고 싶었다. 부모님이 오실 시간에 맞추어 교과서에 나와있는 대로 신중하게 달걀 삶는 과정을 따라 했다. 달걀을 물에 집어넣고 10분만 삶으면 된다고 했다. 10분을 재며 달걀 네 개를 물에 퐁당 집어넣고 가스불에 끓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0분 후에 달걀을 깨보니 이상하게도 날달걀이다. 허무하게 달 걀 네 개를 버린 나는, 달걀 네 알을 더 투입하여 다시 도전했지만 또 실패했다. 순식간에 달걀 여덟 개가 그대로 하수구에 버려졌다. 


다음 날 아침, 부엌에서 엄마가 달걀 바구니를 보고 '이상하다! 달걀이 왜 이렇게 줄었지?' 하며 혼잣말을 하시는 걸 이불속에서 다 듣고도, 나는 모르는 척 더욱더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내가 실패한 원인은 냄비에 달걀을 넣는 순간부터 10분을 세어 달걀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고부터 10분을 재야 했었건만. 돌연 엄마의 손이 떠나고 난 뒤의 나의 일상은 이토록 사소한 일조차 낯설고 어려운 것 투성이었다.


하루 종일 부모님을 기다리기 시작했던 그 시절, 나는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실패하는 일이 많아 자존감이 떨어졌다. 부모님을 위해 한 일이 오히려 흠이 되어, 부모님께 솔직하게 나의 노력을 말씀드리지도 못해 외롭고 서럽기도 했다. 갑자기 변해버린 일상에 대한 아무런 설명조차 듣지 못하였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그저 나 홀로 견뎌내야했다. 또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나는 어렸고, 설명이 필요했고, 위로가 절실했었다. 그래서였던 것일까. 부모님과 하나의 마음을 쪼개 나눈 것처럼 가깝게 느꼈던 유년 시절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단절되었다. 매일 홀로 힘든 마음을 견디느라 나의 마음은 바빠졌고 부모님과는 더 이상 속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렇게 나는 준비 없이 사춘기를 맞닥뜨리게 되었고 원래 그렇게 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치마의 물기를 닦아낸 나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말수 없는 나를 보고 큰 아이는 더욱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내가 화가 나 보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이가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었다. 


내 아이의 아픔이 느껴졌기에, 오히려 이렇게 밖에 반응을 못해준 엄마라 미안했기에, 퍼뜩 떠오른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새삼 안쓰럽고 외로워 보였기에, 당시 힘겨웠을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게 마음 아렸기에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이 마음을 당장 다스릴 수 없어 나는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묵묵히 밥만 먹었더랬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 나는 내 뒤를 쭈뼛거리며 따라오는 큰 아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지나치게 잔소리를 하며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은 바로 나였으므로  엄마인 내가 먼저 용기를 내는 것이 옳았다. 나의 거울이 되어 준 나의 아이에게 감사하며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미안해. 엄마가 너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했어. 엄마를 도우려고 그랬던 것일 뿐인데. 그러다 실수했을 뿐인데,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엄마. 저도 잘못한걸요."


큰 아이의 굳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잡은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큰 아이의 마음도 풀렸으리라. 우리는 가족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온화한 분위기로 돌아간 가족들의 대화가 내 곁에서 즐겁게 연주되고 있었다. 뒷 좌석의 둘째 아이가 과자 봉지를 뜯더니 '엄마 드세요.' 하며 과자를 내게 전해준다. 둘째 아이는 이번엔 큰 아이에게 과자를 나누느라 바쁘다. 그러자 운전을 하던 남편이 말한다.


"어! 아빠 것은 없는 거야? 나는 왜 안 줘?"

"앗! 아빠 죄송해요! 엄마가 나누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그랬어요!"


둘째 아이는 후딱거리며 과자를 집어서는 아빠 입에 넣어준다며 안달이다. 과자를 받아먹은 남편이 장난스럽게 말한다.


"와! 나 마음 상할뻔했어. 서둘러서 다행이다. 유통기한 지날뻔했잖아!"


그러자 두 아이와 나까지 모두 깔깔 웃느라 자동차 안이 왁자했다. 한참을 웃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나와 아이의 마음을 모두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있는지, 유통기한이 지나면 상해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되는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가족 안에서는, 마음에 유통기한이란 없다.'고 말이다.


가족 안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은 여전히 있다. 우리의 마음의 밑바닥에 가족과 함께한 추억과 사랑이 자리하는 한, 가족의 사과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큰 아이가 나의 사과를 받아준 것과 같이, 내가 자라서 부모님의 아팠던 시절을 이해하게 되고 그 뒷모습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렇더라도, 유통기한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서 다가서는 일이 너무 늦어지면 안 될 것이다. 유통기한은 없더라도 외면하는 시간만큼, 회복에 걸리는 시간 또한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큰 아이에게 사과했던 나의 용기가 새삼 대견스러웠다.


때마침, 유튜브 자동 재생 알고리즘으로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 엄마랑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외치며 노랫소리를 더욱 크게 키웠다.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 자리, 편히 쉴 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 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한 때는 멀게만 느껴졌던 마음들이 있었다.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떠나보기로 했다. 꿈을 핑계로 그렇게 멀리멀리 떠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떠나온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내가 돌아오기만을 오래도록 기다리는 그 마음의 인내를그리하여 나 또한 마음들을 찾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임을. 


이제 사춘기를 맞이한 나의 아이들도 먼 훗날 이 노래를 들으며 나와 남편을 떠올려줄까. 이제는 내가 머지않아 독립할 아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도.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작곡 조용필 작사 박주연 노래 조용필)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 자리 편히 쉴 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너를 보낼 때부터 다시 돌아올걸 알았지
손에 익은 물건들 편히 잘 수 있는 곳
숨고 싶어 헤매던 세월을 딛고서
넌 무얼 느껴왔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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