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스너 우르켈의 도시

체코 맥주의 자존심, 플젠

by Total Eclipse






이번 여정은 반 시계방향이다. 체코 프라하에서 시작된 삶과 죽음의 톺아보기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독일 바이에른을 경유한 뒤, 오스트리아의 도시들을 좌에서 우로 탐색한 후 다시 체코의 남쪽 국경을 넘어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 동선을 펜으로 이으면 양 옆이 다소 뚱뚱한, 찌그러진 원형이 된다. 태양의 순방향으로, 또는 역방향으로 비스듬히 나아가게 될 이야기에는 레모나처럼 톡 쏘는 비타민 같은 도시가 활력을 담당해야 한다.

첫 도시 간 이동. 프라하에서 예약한 렌터카를 몰고 뉘른베르크/플젠 방면의 고속도로에 오른다. 한국에서라면 과하다 싶을 속도감인데, 이곳에선 나를 추월하는 차들이 내가 추월하는 차들보다 월등히 많다. 그 가운데에서도 아찔한 순간은 찾아볼 수 없다. 차선과 차량이 기계적으로 알차게 착착 맞물리는 느낌? 차분함과 느림은 유럽의 고속도로에서 확실히 구별되는 성질이다. 여기서는 차분하게 빨라야 한다. 어려울 것 없다.

한 시간 남짓 달려 플젠(Plzeň)에 도착했다. 체코의 국민차 스코다(Škoda) 공장이 있는 대표적 공업도시지만 세계인들에게는 맥주의 도시로 더 알려져 있다. 스메타나가 김나지움에서의 학창 시절을 보낸 곳, 플젠에 오기로 마음먹었다면 맥주 양조장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그건 죄를 짓는 것이다.

필스너 우르켈 공장 정문


세계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가 체코라는 사실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한 사람이 일 년에 140리터를 마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음주 가능 여부를 따지지 않고, 국민 한 명이 하루에 500cc 잔 하나씩을 거의 다 채워 마시는 셈이다. 성인만 대상으로 한 조사였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주당들의 맥주 소비량은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유럽에 물보다 맥주가 싼 곳은 많고, 체코도 마찬가지다. 많이 마셔본 사람만이 맛을 평가할 수 있는 법. 세계 1위 맥주 소비 국민에게 선택받은 맥주는 이제 세상에서 너무도 유명해져 버렸다.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그 황금빛 자태가 빚어진 본산이 이곳이다. 양조장 투어는 참새의 방앗간이다.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투어

영어를 특유의 체코 억양으로 발음하는 가이드의 목소리는 오히려 집중을 부른다. 어색한 듯 들리지만 매 문장의 끝을 어김없이 내려 깔며 안착시키는 것이 되레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었나 보다. 아직도 그의 말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세계 각지에서 온 맥주 애호가들은 보리 음료에 대한 설렘으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다. 방문자센터 벽면의 자료들로 기초 교육을 마친 투어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공장 단지 안쪽 깊숙이 있는 양조장으로 향한다. 늦여름의 알맞은 더위와 습도는 투어의 피날레인 시음 과정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고 있지만 참아야 한다. 다른 참가자들의 표정을 살핀다. 난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참고 있다. 인내는 함께 할 때 달콤해지는 것. 군침을 삼키고 아직은 가이드를 바라봐야 할 때다.

필스너 우르켈 맥주의 포장라인과 옛 증류기 견학


체코의 도시 플젠(Plzeň)의 독일어 지명은 필젠(Pilsen)이다. 필스너(Pilsner)는 '필젠의', '필젠에서 만들어진'이란 뜻이고, 우르켈(Urquell)은 독일어로 오리지널이란 단어. 필스너 우르켈은 그러니까 '플젠의 오리지널 맥주'가 된다. 필스너 우르켈이 명성을 얻은 까닭은 에일이 아닌 라거맥주로 대중화에 성공한 것. 1840년대 유럽맥주는 독일의 바이스비어(Weisbier) 등을 위시한 에일 맥주의 전성기였다. 상온의 양조과정에서 발효된 효모는 맥아즙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 효모를 이용해 제조한 맥주는 색이 진하고 맛이 강하다. 최근 들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대부분의 수제 맥주는 이런 상면 발효 방식의 에일이다. 냉동과 냉장시설이 필수인 라거는 반대로 발효과정에서 가라앉은 효모를 사용한다. 즉 하면 발효 방식의 술이다. 저장이 유리한 라거 맥주의 색은 빛나는 황금빛이고 에일에 비해 청량하고 깔끔하다. 하면 발효 제조방식은 독일 뮌헨에서 먼저 도입했으나, 제대로 된 품질로 대량 생산에 성공한 라거 맥주는 바로 필스너 우르켈. 전 세계 라거 맥주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대기업들도 플젠의 오리지널 형님 앞에서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고대하던 시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회벽의 지하창고 안쪽으로 줄지어 들어가니 급격하게 온도가 내려간다. 거대한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맥주는 이방인들의 목 넘김을 기다리고 있다. 나무통 안, 탁해 보이는 맥주는 투명한 잔으로 갈아타고 나서는 1급 황금수의 자태를 뽐낸다. 맥주 한 잔 시음이 이렇게 설렐 일인가. 잠시 머뭇거린다. 긴장을 했다는 증거다. 180년 역사의 필스너를 본 고장에서 맛볼 수 있는 사람은 긴장해 머뭇거려야 마땅하다. 눈을 감고 입술과 맥주의 접점을 느껴본다. 왜 사람들은 아찔한 순간엔 꼭 눈을 감는 걸까. 구강으로 들어온 황금은 목젖을 적신 후 식도로 내려간다. 유유히. 유체의 이동에 주변의 세포들이 깨어난다. 씁쓸한 청량함이란 게 이런 것인지. 이어서 오리지널 라거의 풍미는 전신을 순환한다. 뱃살을 얻는다 해도 포기하지 못할 악마의 황금수인가.

화들짝 놀란 건 그다음이다. 북한에서 판 땅굴을 발견했을 때도 이렇게 충격이었을까. 저장고에서 가지를 뻗친 땅굴들은 플젠 시내에 있는 맥줏집들과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플젠의 웬만한 호프에서 마시는 필스너 우르켈은 지하 저장고 산지 직송이다. 맥주가 지하의 모세혈관을 따라 곳곳으로 퍼지는 도시, 플젠은 자연산 라거 맥주의 파라다이스다.

지하 저장고와 시음 공간

인터넷이 아닌 비어넷으로 연결된 플젠의 주민들은 필스너의 자존심이 핏속에 흐를 것 같다. 134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던 카렐 4세는 맥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수도원 양조장을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맞다. 카를교를 만들었던 그 카렐 4세다. 이때부터 수도원 맥주의 전통이 이어져 체코의 맥주 산업이 성장을 해 왔고, 끝내 명품 맥주 필스너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체코의 의식주에서 카렐 4세의 흔적을 찾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묘지에서 맥주 공장으로의 점프는 이질감이 없었다. 죽음이 삶의 현장에 가까이 있고, 삶은 죽음을 의식하며 이어지는 동유럽의 공간에서, 추모와 축제는 한데 섞여 경쾌하게 춤을 추었다. 첫인상의 체코는 여정 끝자락에서 만난 체코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그건 탐방의 마무리에서 알게 되겠지.

플젠의 석양은 필스너 우르켈의 황금빛과 쌍둥이가 되었다. 지하 저장고에서 터널을 따라 흐르는 축복의 젖줄은 또 다른 스메타나의 <블타바>가 아닌가.





keyword